한국일보
화마가 앗아간 3남매의 비극.. 엄마는 술에 취했고, 아빠는 PC방서 게임에 빠졌다
안경호 입력 2017.12.31. 16:19
엄마는 술에 취했고
아빠는 PC방서 게임
경찰 방화ㆍ실화 두갈래 수사
31일 오전 2시26분쯤 광주 북구 두암동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네 살과 두 살 남아, 15개월 된 여아가 숨졌다. 베란다에서는 아이들의 어머니(21)가 팔과 다리에 화상을 입고 쓰러진 채 구조됐다. 광주 북부소방서 제공
2017년 마지막 날 새벽 광주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나 다섯 살도 안 된 어린 3남매가 숨지는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화재 당시 갓 스물을 넘긴 엄마는 술에 취해 있었고, 아버지는 PC방에서 게임에 빠져 있었다.
31일 오전 2시26분쯤 광주 북구 두암동 L아파트 11층 A(21)씨의 집 작은방. 거실 쪽에서 불꽃이 튀는 소리에 잠을 깬 A씨는 화들짝 놀랐다. 검은 연기와 함께 시뻘건 불길이 방 쪽으로 번지고 있던 터였다. 당시 술에 취해 있던 A씨는 베란다로 몸을 피한 뒤 전 남편인 B(22)씨의 친구에게 불이 난 사실을 알리고 119에도 신고했다. 불은 작은방을 모두 태우고 부엌과 거실 일부를 그을린 뒤 25분여 만에 꺼졌다. A씨는 손과 발에 2도 화상을 입었다. 하지만 작은방에 있던 A씨의 큰아들(4)과, 둘째 아들(2), 15개월 된 막내딸은 숨진 채 발견됐다. A씨가 베란다로 피신하면서 이들 남매를 대피시키지 못한 것이다.
나흘 전 B씨와 이혼한 A씨는 30일 오후 7시40분쯤 B씨와 아이들을 집에 남겨두고 외출했다가 친구들과 술을 마신 뒤 만취해 31일 오전 1시53분쯤 귀가했다. 이혼 후에도 같이 살던 B씨도 A씨가 외출하자 두 시간 여 뒤 아이들을 재우고 PC방으로 가 온라인 게임에 빠져 있었다.
사고 직후 A씨는 화재 원인을 두고 “라면을 끓이기 위해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놓고 아이들이 있는 작은방으로 들어가 깜박 잠이 들었다”고 했다가 “담뱃불 때문인 것 같다”고 말을 바꿨다. A씨는 경찰에서 “귀가하면 라면을 끓여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그러지 않은 것 같다”며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날씨가 추워 거실로 들어와 담배를 피웠는데, 막내딸이 잠에서 깨면서 울길래 방으로 들어가 딸을 안고 잠들었다. 담뱃불을 어떻게 껐는지는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A씨는 남편 B씨와의 사이에 아이가 생기자 양가 부모의 허락을 받고 2011년부터 동거해왔으며, 2015년 혼인 신고했다. 그러나 A씨가 최근 실직한 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B씨와 생활고 문제 등으로 다툼이 잦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A씨 부부는 올해 1월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했지만 “부양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수급자로 선정되지 않았으며, 2월부터 7월까지 6개월 간 긴급생활자금(매달 130여만원)을 받아온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일단 화재 현장 감식 결과 작은방에서 인화성 물질이 발견되지 않은 데다, A씨가 거실에서 담배를 피웠다고 진술한 점 등으로 미뤄 실화에 무게를 두고 조사 중이다. 하지만 화재 당시 A씨가 자녀들을 내버려두고 혼자서 대피하고, 화재원인을 두고 진술이 오락가락하는 등 석연찮은 부분도 있어 방화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경찰은 숨진 아이 3명에 대한 부검을 진행해 사인을 가릴 방침이다.
광주=안경호 기자 khan@hankookilbo.com(mailto:khan@hankookilbo.com)
'슬픈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7년만에 받은 사과 (0) | 2018.01.02 |
---|---|
일자리 지키려 '뒷돈'까지 바치는 촉탁직 경비원의 비애 (0) | 2018.01.01 |
"대기업 들어오니 비워라" 상인들부터 내쫓은 아웃렛 (0) | 2017.12.31 |
뿌리 찾아 고국 땅 밟았건만..어느 입양인의 '쓸쓸한 죽음' (0) | 2017.12.28 |
"돈 다 드릴테니 불법주차 차 밀고 구조해달라 했는데.." (0) | 2017.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