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일자리 지키려 '뒷돈'까지 바치는 촉탁직 경비원의 비애
김지혜 기자 입력 2018.01.01. 22:27
[경향신문] ㆍ서울의 한 아파트서 1년9개월 근무한 60대
“저희 아이들 이름을 외운 유일한 경비원이신데….” 서울 대치동 ㄱ아파트에서 1년9개월간 촉탁직 경비원으로 일해온 한모씨(66)는 지난해 11월 입주자대표회의로부터 그해 12월31일자로 근로 계약이 종료됐다는 일방적 통보를 받고 일자리를 잃었다.
주민들은 한씨를 “지금까지 어떤 경비원보다 열심히 일하신 분”이라 했지만 관리사무소 측은 한씨의 계약 종료 사유를 ‘근무 태만 등의 민원 제기’라고 밝힐 뿐이었다. 2013년 서울 강남의 다른 아파트 근무 당시 경비원 용역 전환을 반대해 고공농성에 나서기도 했던 한씨는 “사업 실패 후 경비원 일을 ‘마지막 직업’이라 여기고 20년간 성심껏 일했는데 매번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허탈하게 일자리를 잃었다”고 말했다.
고용 불안은 한씨와 같은 촉탁직 경비원들에겐 ‘늘 달고 사는 지병’과 같다. 촉탁직 경비원들은 정년이 지난 고령의 기간제 노동자로, 3개월·6개월·1년 등 계약 기간이 짧다. 고령자 채용을 장려하되 고용주들의 부담을 덜어준 ‘고령자고용촉진에 관한 법률’을 적용받아 일반 기간제 노동자처럼 2년 이상 일해도 무기계약직이 되지도 못한다.
문제는 이들의 ‘운명’이 전적으로 사용자나 중간 관리자의 평가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경비원들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관리자들의 눈치를 보거나 심하게는 ‘뇌물’까지 바쳐야 하는 압박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한씨는 ㄱ아파트 관리사무소에 경비원들의 근태를 보고하는 경비팀장 ㄴ씨가 경비원들에게 금품을 우회적으로 요구해 챙겨왔다고 주장했다. 근로계약 갱신 과정에서 팀장의 보고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악용했다는 것이다. 한씨와 다른 경비원들의 주장에 따르면 ㄴ씨는 2016년부터 공공연하게 “한씨를 잘라버리겠다”는 말을 퍼뜨렸고, 한씨는 고민 끝에 ㄴ씨에게 2016년 추석에는 술 2병, 지난해 추석에는 현금 5만원을 줬다고 한다.
2016년 12월 ㄱ아파트에서 해고됐다는 경비원 오모씨(63)도 “재계약 여부가 불투명하다 보니 잘 보여야겠다는 마음으로 현금 5만원을 준 적이 있다”며 “경비팀장이 직접적으로 돈을 달라고 한 적은 없지만, 다른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돈을 줘야 한다는 간접적인 압박을 받아왔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ㄴ씨는 경향신문과의 통화에서 “주민들에게서 명절 격려금을 받는 경비원들 중 7~8명이 (격려금을 받지 못하는) 팀장을 배려해 5만원씩 줬던 건 사실이나 강요는 없었다”고 말했다.
이 아파트는 경비원 104명 중 절반 이상이 촉탁직이다. 관리사무소 측은 “촉탁직 계약 갱신 여부는 경비팀장이 보고한 근무 태도와 주민들이 제기한 민원 등을 종합해 결정한다”며 “한씨의 경우 합당한 평가를 통해 결정한 것이고, 자세한 평가 항목은 내부 규정이라 밝힐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씨는 “근태가 불량했다는 민원을 서류 등으로 확인한 적이 없다”며 “주차 자리를 확보해 달라는 입주자대표회의 간부의 요구를 받아주지 않는 등 비위를 거슬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에 따르면 만 60세 이상 고령자 고용률은 2016년과 2017년(9월 기준)에 각각 66.1%, 68.1%로 매년 높아지고 있다. 고령화 가속에 따라 촉탁직이 늘어만 가지만 이들의 고용 안정을 보장할 법적 제도나 사회 인식 모두 현실에 못 미치고 있는 셈이다. 노동법률사무소 ‘시선’의 김승현 노무사는 “촉탁직 근로자들에게 고용을 미끼로 금품을 요구하는 것은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며 “법적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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