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믿었던 신앙이 나를 배신했다"
[인터뷰] 단원고 고 김주희 양 어머니 이선미 씨,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신앙을 보여 달라"
데스크 승인 2014.11.04 18:29:58 이사라 (sarahlee)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 단원고 고 김주희 양 어머니 이선미 씨는 세월호 참사 이후 교회를 안 다닌다. "내가 믿었던 신앙이 나를 배신했다"며, 기독인에게 말이 아닌 행동으로 신앙을 보여 줄 것을 부탁했다. ⓒ뉴스앤조이 이사라 |
"만약 예수님이었다면,
이런 불의를 보고 정말 가만히 계셨을까요.
왜 희생된 아이들에 대해 분노하지 못하나요.
입으로는 아픔을 같이한다고 하면서,
왜 아무런 행동이 없나요. 왜 기독인은 말만 합니까"
4·16 세월호 참사 희생자인 단원고 2학년 10반
고 김주희 양 어머니 이선미 씨를 처음 만난 때는
지난 10월 22일이었다.
그날 기자는 세월호 유가족 중 기독인을 인터뷰하기 위해 안산 정부 합동분향소에 있었다.
원래 인터뷰하기로 한 유가족이 몸 상태가 좋지 않다며
인터뷰를 고사했다.
다른 기독인 어머니를 소개시켜 준다고 했다.
그 자리에 주희 양의 어머니, 이선미 씨가 있었다.
기독 언론사라는 이야기를 들은 주희 어머니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성경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고 했다.
기자는 그런 것보단,
참사 이후 느꼈던 교회의 모습이나
본인의 신앙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했다.
순간 이선미 씨의 목소리가 커졌다.
"저는 참사 이후 교회 안 다녀요."
비수와 같은 말이었다.
그동안 기독인 유가족을 만나며, 신앙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지만,
이렇게 대 놓고 교회를 안 다닌다는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무슨 까닭일까. 무엇이 10년 동안 다녔던 교회에서 그를 멀어지게 한 것일까.
10월 31일 오후 1시, 안산 분향소에서 주희 양의 어머니를 다시 만났다.
그런데 갑자기 서울에 올라가야 한다고 했다.
저녁에 서울에서 간담회 일정이 잡혀 있는데, 아무도 갈 사람이 없어서 본인이 가야 한다고 했다.
열감기가 심해 이날은 안산에서 쉴 계획이었던 이선미 씨는 아픈 몸을 이끌고 서울로 향했다.
서울로 향하는 차에서 이선미 씨는 금세 잠이 들었다.
늘 쉬지 못하고 여기저기 간담회 일정으로 바쁜 탓이었다.
결국, 서울에 도착해서 인터뷰를 다시 진행했다.
광화문광장 근처에 있는 한 카페, 이선미 씨는 담담한 어조로 입술을 떼었다.
중간중간 대화를 잠시 멈추기도 했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말로는 다 표현 못 할 그의 슬픈 심정이 느껴졌다.
주희 양의 어머니는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에 더 아파해야 했다.
교회를 사랑한 까닭에 실망이 더 컸다.
교회와 교인을 믿었기에, 기대했기에, 사랑했기에 그랬다.
- 세월호 참사 이후 왜 교회를 안 다니게 되었나.
신앙생활을 한 지 10년이 되었다.
매 주일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주희는 기독교 동아리인 YMCA에서 활동을 했다.
그런데 내가 믿었던 교회였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나는 더 많이 실망했다.
참사 후, 초기에는 많은 기독인이 함께 아파하고 공감한다고 생각했다.
주희는 학교에서 기독교 동아리 YMCA에서 활동을 했다.
삼일장으로 주희의 장례식을 치를 때,
YMCA 동아리 친구들과 관련 사람들이 와서 3일 동안 장례 마무리까지 도와주었다.
역시 믿음 있는 사람은 다르구나, 우리 주희가 복이 있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신앙을 가졌다는 어른들의 모습은 그게 아니었다.
행동하는 신앙으로 유가족과 함께하는 기독인의 수는 소수에 불과했다.
- 기독인에게 실망한 까닭은 무엇인가.
▲ 단원고 2학년 10반 고 김주희 양의 소원은 평생 엄마랑 같이 사는 것이었다. 결혼하면, 커다란 집을 지어서 부모님과 같이 살겠다고 했다. 학교에서 YMCA 동아리 활동을 하기도 했다. (사진 제공 이선미) |
말로는 아픔을 같이한다고 했다.
공감한다고 했다.
이해한다고 했다.
그런데 말뿐이었다.
행동이 없었다.
기도로만 아픔을 풀어 가고,
기도로 아픔을 치유해야 한다고 했다.
교회는 나와 유가족을 상처가 있는 사람,
위로가 필요한 사람으로 대했다.
자신들의 틀 안에 우리를 가두어 놓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 같았다.
가족이라고, 한 형제자매라고 말하지만
뒤돌아서면 남이었다. 우리를 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필요할 때만 형제자매이고, 정작 내가 어렵고
힘든 때가 되니 등을 돌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관심이었다.
신앙이 있다는 사람이 이래도 되는 것일까.
그동안 내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졌던 믿음의 모습이 아니었다.
가장 약하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기독교가 존재해야 하는데…. 결국, 가장 힘들어하고 사회에서 외면당하고,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 어디에도 끼지 못한다.
세월호 유가족은 그들에게 그늘일 뿐이다.
낄 수가 없다.
결국 내가 믿었던 신앙이 나를 배신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파하는 사람들 편에 서야지,
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이미 상처받은 우리를 비난하는지. 그것이 과연 신앙인의 모습이었을까.
- 기독인에 대한 바람이 무엇인가.
세월호 진상 규명은 모두가 같이 싸워야 할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독인 중에 그만하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텔레비전에서 유가족을 매도하는 이야기만 듣고 그만하라고 한다. 욕하기도 한다.
다른 걸 다 떠나서, 희생된 자들이 어린아이들이다.
텔레비전에서 무슨 말을 하든지, 어떻게 사람으로서 이 참사를 옆집 불구경하듯이 볼 수가 있나.
신앙을 가졌다는 사람이, 아니 심지어 신앙생활을 남들보다 더 오래했다는 사람이 그랬다.
그러면 도대체 뭐하러 믿음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느냐. 그들이 가진 신앙은 도대체 무엇이냐.
10월 29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를 방문해 시정연설을 했다.
유가족은 109일이 넘도록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국회에서 노숙했다.
하지만 29일, 경찰은 어떻게 해서든지 유가족이 대통령을 만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우리를 에워쌌다. 아침부터 경찰 통제선을 쳤다. 경찰, 국회 경위, 청와대 경호원 들까지 나서서
유가족이 대통령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했다.
나는 당시 부산에 간담회 일정이 있어서 현장에는 없었지만,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소식을 접했다.
나도 속상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부모들이 참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가족을 외면한 대통령은 시정연설을 마치고 국회를 떠나면서 웃음을 보이기도 했다.
바로 옆에서 울부짖으며 한 번만 만나 달라는 유가족이 있는데, 어떻게 웃으며 유유히 나갈 수 있을까.
근데 그 모습을 보면서 가만히 있는 국민은 뭔가.
종교 단체에서도 아무런 말이 없다.
우리는 이 나라의 국민이 아니라 철저하게 배척되는 느낌이 든다.
필요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것 같다.
만약 예수님이 있었다면 이런 불의를 보고 정말 가만히 계셨을까.
가만히 있으라고 가르치셨을까.
절대 아니다.
목사님도 목자이시다, 그러면 양떼인 우리를 위해 목사님이 나서야 하는 거다.
잘못된 거면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가르치고, 알리고, 도와야 한다.
그런데 말뿐이신 목사님, 말로만 한가족이라고 했던 형제 자매들….
나는 이제라도 기독인이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 제대로 된 신앙을 보여 주지 않으면,
평생 신앙생활을 못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 단원고 2학년 10반 고 김주희 양이 2014년 3월에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다. 사진 맨 오른쪽이 고 김주희 양. 주희는 친구들 사이에서 '마마걸'이라고 불렸다. 외동딸이었던 주희는 애교가 많았다. 학교 가기 전에는 꼭 엄마에게 뽀뽀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밥 먹는다고 문자를 보냈다. 학교가 끝나면 집 앞에 나와 있으라고 문자를 했다.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사진 제공 이선미) |
전에는 너무 힘들어서 어쩔 수 없을 때만 '땜빵'으로 간담회에 가서 발언했던 이선미 씨다.
하지만 이제는 일정이 되는 대로 무조건 간다.
정말 몰라서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단지 세월호 유가족의 희생당한 자녀들만 위해서가 아니다.
외동딸을 잃은 주희 양의 어머니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다음 세대를 위해 이 일을 하고 있다.
주희 양의 어머니, 이선미 씨는 하나뿐인 딸 주희를 잃었다.
주희는 친구들 사이에서 '마마걸'이라고 불렸다.
학교 가기 전에는 꼭 엄마에게 뽀뽀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밥 먹는다고 문자를 보냈다.
학교가 끝나면 집 앞에 나와 있으라고 문자를 했다.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주희의 소원은 평생 엄마랑 같이 사는 것이었다. 결혼하면, 커다란 집을 지어서 부모님과 같이 살겠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지금 우리는 돌밭 같은 사회를 가꾸어 밭으로 만드는 거다.
이 사회를 밭으로 만들기만 해도 다음 세대가 씨를 뿌릴 수 있고, 그 다음 세대가 열매를 수확할 수 있다.
다시는 이런 사고에 대해 무심한 나라가 아닌 안전한 나라, 제대로 법의 테두리가 보장되는 나라를 만들자고 하는 거다"
많이는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할 수 있는 만큼, 당신이 생전에 할 수 있을 만큼만 안전한 사회를 이루어 놓으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이날 저녁, 인터뷰를 마친 주희 양의 어머니는 감기로 아픈 몸을 이끌고 간담회로 향했다.
감기야 나으면 된다고 했다.
병은 아파도 나을 텐데,
이런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는데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것들이 안 나으니까 그것이 문제라고 했다.
주희 양의 어머니는 여전히 자신이 '사랑했던 교회가, 기독인이 결국 내 편이 되어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런데 아직은 아니라서,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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