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강사 1만 명 일자리 잃었다.."박사 따서 편의점 알바 할 판"
전민희 입력 2019.06.06. 00:05 수정 2019.06.06. 06:43
강사법 시행 두 달 앞 벌써 부작용
3년간 재임용 보장 규정하자
대학선 "강사 제로 만드는 게 목표"
"4대 보험 되는 곳 취직하고 보자"
강사들, 커피숍·병원서 알바
지난 3월 서울 에서 열린 강사 구조조정 반대 집회에서 한 참가자가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과 충청 지역 대학에서 보건 분야 강의를 하는 A씨(36)는 지난 3월 서울의 한 병원에 취업했다.
월·목요일에는 대학에서 강의하고, 화·수·금요일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병원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다. A씨가 병원에서 근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올해 8월 ‘고등교육법 일부 개정안’(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4대 보험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A씨가 이런 결정을 내린 데는 친한 교수들의 조언이 큰 역할을 했다.
그들은 “8월에 강사법이 시행되면 대학은 4대 보험이 있는 강사를 겸임교수로 우선 채용할 수밖에 없다.
살아남으려면 4대 보험이 되는 곳에 취직하라”는 얘기를 공공연히 했다.
강사법에서는 3년간의 재임용 절차와 방학 중 임금·퇴직금 지급 등 최소한의 지위를 보장하지만
겸임교수는 이를 보장해 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대학, 재임용 의무 없는 겸임교수 선호
교수들은 또 “대학이 강사를 제로(0)로 만드는 게 목표”라는 말도 자주 반복했다.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교육부에서 다른 직업이 없는 전업강사 고용 변동상황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겠다고
나서자 대학들이 마련한 대응책이다. A씨는 “사실상 4대 보험이 없으면 2학기 때 강의를 맡기 어려울 것”이라며 “직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주 15시간 이상 일하면 4대 보험 가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보건 분야 강사 중에는 병원에 취직하려는 사람이 많다”고 전했다.
강사법 시행을 두 달 앞두고 시간강사들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이들은 당장 다음 학기부터 대학에서 강의를 맡지 못할까 우려해 다른 일을 찾거나 아르바이트를 구하느라 분주하다. 서울의 한 사립대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는 B씨(35)도 마찬가지다. B씨는 최근 성형외과에서 외국인 환자를 상대로 한 통역 업무와 편의점·커피숍 등의 시간제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 올해 1월부터 다니던 회사는 지난달에 그만뒀다.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불안한 마음에 입사했던 곳이었다. 박사학위를 인정해 주지 않았고, 월급도 또래 직장인에 비해 적은 편이었지만 주 1회 대학 출강을 양해해 줘 입사했다.
하지만 막상 회사에 들어가자 처음 이야기했던 것과 상황이 달랐다.
불필요한 야근을 강요하거나 B씨 담당이 아닌 업무를 떠넘기는 일도 잦아졌다. 강사법 시행에 대한 대학의 방침이 설 때까지는 버티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오후 10시까지 이어지는 야근 때문에 다음날 강의까지 지장이 생기자 B씨는 결국 퇴사를 결심했다. B씨는 “이제 와서 교수 임용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구직활동을 하자니 그동안 공부한 게 아깝고, 경력이 부족해 뽑아주는 곳도 없다”며 “10년 걸려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편의점에서 알바를 하게 생겼다”고 한탄했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강사들의 불안감은 지난달 30일 고려대가 서울 주요대 중 처음으로 강사 공개 채용에 나서면서 현실화됐다. 고려대가 채용 자격 기준을 기존보다 높게 잡았기 때문이다. 고려대는 2단계 채용절차 중 1차 기초평가에선 지원자의 학력·경력·강의계획안을 보고, 2차 평가에서는 최근 3년간의 연구실적, 지원자가 제출한 교육철학기술서를 근거로 면접 등을 진행키로 했다.
경기도의 한 사립대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는 C씨(37)는 “강사 중에는 교수 임용을 준비 중인 사람도 있지만 강의를 업으로 삼아 일하는 경우도 많다”며 “이들에게 논문 실적을 요구하는 건 결국 대학이 전임교원 수준의 실력을 갖춘 강사를 뽑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B씨도 “논문을 학회지에 게재하거나 실적이 인정되는 국제학술대회에 참석하려면 수십만~수백만원이 드는데 한 달에 강의료 70만원을 받아 이를 진행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전임교원처럼 대학이 기본 연구 인프라를 제공하지 않는 상황에서 강사 채용 시 논문 실적을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고려대 관계자는 “공개 채용을 하게 되면 여러 사람 중 일부를 선발해야 하므로 지원자가 해당 분야 전문성을 갖췄는지 판단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할 수밖에 없다”며 “3년간의 연구실적 제출은 의무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정교수 수준의 강사를 뽑으려 한다는 비판은 맞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정부 대책은 “평생학습 강의 주선”
교육부가 채용 과정을 투명하게 하기 위해 공개 채용을 의무화한 것을 두고도 강사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나온다. 강사 일자리가 지도교수와 선배 등의 학연을 이용해 알음알음 채용되는 일을 막겠다는 취지지만 실효성이 없을 것이란 내용이다. 서울 등 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는 D씨(32)는 “공공기관 채용처럼 블라인드로 이뤄지는 게 아닌 이상 다른 조건이 비슷하면 출신학교 지원자한테 마음이 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며 “결국 여러 대학에 지원하느라 강사들의 고생은 늘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가 내놓은 해고 강사 구제책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교육부는 해고 강사에게 연구지원사업비 280억원을 우선 지원하고, 지역사회 평생학습·고교학점제 프로그램에서 강의할 수 있게 연결해 주는 정책을 추진할 방침을 세웠다. 강사법 시행에 앞서 올해 1학기에만 약 1만 개의 강의 자리가 줄어들자 마련한 대책이다. 이에 대해 서울 지역 시간강사(37)는 “학생을 가르치는 게 적성에 맞고 전공 관련 연구를 계속하고 싶어 이 길을 선택했는데 미래가 없는 것 같다”고 씁쓸해했다.
전민희 기자 jeon.minh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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