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서해순 “이 모든 게 돈 때문…김광석 관련 일 더 관여 안할 것”
기사입력2017.10.03 오후 3:36
최종수정2017.10.03 오후 4:16
1일 서울 중구 한 오피스텔에서 가수 고 김광석씨의 부인 서해순씨를 만났다. 서씨는 김씨의 친형 김광복씨로부터 유기치사 및 소송사기 혐의로 고발돼 경찰 조사를 앞두고 있다. 서씨는 “이 모든 게 돈 때문이다. 2005년 저작권 소송 때 피고에 나뿐 아니라 딸 서연이 이름까지 올랐다”며 “더는 김광석씨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 1일 <한겨레>가 서울 중구의 한 오피스텔에서 서해순씨를 만났다. 남편인 가수 고 김광석씨가 숨진 지 21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김광석씨 사망과 관련한 여러 의혹의 당사자로 지목되고 있는 서씨는 자신과 관련한 여러 의혹들을 거듭 정면으로 부인했다. <한겨레>는 서씨에게도 충분한 반론의 기회를 주고 고 김광석씨, 딸 서연양과 관련해 제기되는 의혹들을 종합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고 판단했다. 서씨와의 인터뷰는 낮 12시부터 2시간30분동안 진행됐다.
이날 서씨는 21년째 각종 의혹이 거둬지지 않고 있는 이유에 대해 “다 돈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2005년 소송의 피고는 나뿐 아니라 딸 서연이였다. 어떻게 조카 것을 뺏으려고 하느냐며 김광복(고 김광석 형)씨 사무실까지 찾아갔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1996년 시댁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던 것에 대해 “음반사에서 원래 매달 나와 남편에게 주던 저작권료를 남편이 죽은 뒤 갑자기 아버님에게 줘서 (내가) 대출금도 갚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시댁) 어른이 하는 말씀이라 들었는데 차일피일 (돈 돌려주는 것을) 미루기만 해서 소송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서씨는 “이상호 기자에게는 처벌만이 아니라 반드시 공개사과를 받아내겠다”고 강조했다.
서씨는 미국에서 함께 산 것으로 알려진 남성에 대해 “제 딸 서우(서연양 애칭)를 예뻐해주고 학교도 데려다주고 해서 좋아했던 사람이다. 하와이에 있을 때 가게 일도 도와줬던 사람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남편 잃고) 혼자된 여자가 남자를 만난 건데, 동거남을 내연남이라고 언론에서 보도했다. 남편 김광석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동시에) 내연남을 만난 것으로 보도하는 건 잘못”이라고 설명했다.
서씨는 김광석 앨범에 대한 애착도 나타냈다. 그는 소송 등을 통해 문제가 된 김광석 3집과 4집 그리고 김광석 다시부르기 1, 2집에 대해서는 “김광석 생전에 내가 직접 제작에 참여한 앨범들”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김광석 3집>을 두고 “내 퇴직금으로 만든 것이 3집이다. 김광석의 (음반)제작자, 매니저로 역할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밖에도 수년간 소송을 벌였던 시댁에 대한 분노, 장애가 있는 딸을 홀로 키우던 어려움, 생전에 느꼈던 남편에 대한 서운함 등을 쏟아냈다.
서씨는 <제이티비시>(JTBC) 등 앞선 두 차례 방송 인터뷰 때와 달리 비교적 차분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둘러싼 의혹들에 대해 설명했다. 하지만 한 화제에 집중하지 못하고 주변 얘기들로 빠져 버리는 수다스런 모습도 비쳤다. 서씨 주장을 객관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그의 말을 살려서 가급적 그대로 싣는다.
-세간에서 김광석 타살 의혹 계속 제기했는데 왜 지금 대응하게 된건가.
“기사를 경쟁하듯이 너무 자극적으로 쓴다. 사실도 아닌 얘기를 기자들이 팩트도 확인 안하고 써대니까 문제가 많다. 이상호는 나를 20년 동안 쫓아다녔다. 징그럽다. 영화는 안 봤다. 대응을 하다보면 더 커질 거 같아서 안하려고 했다. 안하면 안한다고 또 뭐라고 한다.
이제 서연이가 살아있으면 스물일곱이다. 사위 맞을 나이다. 중년 아줌마인데 이 나이까지 이십년 넘게 그런 소리를 들어야겠나.
내가 일부러 (제이티비시에) 나간 게 이상호씨가 뭘 모르는 것 같아서였다. ‘나 그냥 아줌마니까 나와라, 할 말 있으면 이상호씨 나오고 김광복(김광석의 형)씨 나오면 내가 나가겠다 불러라’ 했다. ‘나에게 왜 이렇게 하는지, 치사하게 뒤에서 날 씹지 말고 남자답게 나와서 방송에서 얘기하자’고 그랬다. 여자 하나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고 살인자 만들고 그러는 게 정정당당한 일이냐. 이건 외국에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인권위원회에 제소했고 엠네스티에도 고발하고 싶다. 법적인 제재는 변호사가 하겠지만 이건 법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매장이니까. 같이 풀어가야지. 언론을 만나면 이상한 것만 물어보니까. 이번에는 (이상호 기자, 김광복씨 등을) 처벌할거다. 변호사와 상의해서 무고죄 등으로 고소하려고 생각 중이다.
서연이 문제까지만 제기 안됐으면 넘어가려고 했다. 하도 듣던 말이니까. 그런데 위드삼삼(서씨가 운영하는 회사)이라는 회사도 있고 거기 직원도 있고 이사도 있어서. 회사에서도 대응하실거냐고 하길래 하게 됐다.”
-좀 가벼운 얘기부터 하겠다. 어떻게 김광석 만나게 됐나?
“고2 때 의대생 가정교사 오빠가 품바 무슨 연극을 보여준다고 같이 갔다가 또래(관객)들이 통기타 가지고 모여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김광석씨였다. 그때 이후로도 한참은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대학을 원하는 곳을 못가고 홍콩으로 유학을 갔다가 다시 들어오면서 연락이 끊겼다. 나중에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일할 때 우연히 사촌 동생이 동물원 공연을 보러 가자고 해서 보러 갔다가 다시 만났다. 그때 이후로 내가 어디에서 일하는지 알았으니까 김광석씨가 애정공세를 해서 그렇게 됐다.”
-김광석씨 만나기 전에 결혼을 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안다.
“그 중간에 이상한 남자를 만나서 문제가 있었다. 엄마가 홍콩에 있을 때 만났는데 엄마랑 사이가 안 좋아져서 집을 나와 버렸었다. 그때 애를 가져서 배도 불러오고 그 남자가 미국 시민권자고 해서 비자를 받을 수 있다고 해서 같이 미국에 가려고 결혼을 해버렸다. 그때 22살밖에 안됐는데 나이 차이가 많은 남자를 믿었던 거지. 근데 그 사람이 알고보니 사기꾼이어서 7개월 된 아이를 서울 홍은동 산부인과에 가서 뗐다. 김광석씨 만나기 전 22살 일이다. 김광석씨는 다 알고 있었다. 결혼하면 여자의 과거는 남자가 보호해줘야지. 호적에 안 넣었으면 없었던 것처럼 결혼할 텐데 그때 철딱서니 없이 결혼을 했으니까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애를 뗀 걸 가지고 이상호 기자는 ‘내가 애를 낳아서 죽였네’ 하고 (의혹을 제기한다).”
-처음부터 시댁하고는 사이가 안좋았나?
“아니다. 결혼 초기에는 김광석씨가 생활력이 없을 땐데 내가 호텔 다니면서 일을 하니까 시댁에서는 좋아했다. 싫어할 수가 없었다.”
-최근 인터뷰에서 김광석씨 성격에 대해 언급했다.
“(김광석씨가) 동물원 (활동) 때 주변 여자들에 둘러싸여서 인기에 취해 있었다. 밥 먹으면서도 팬하고 전화를 두 시간씩 하고 그랬다. 그게 신혼 때다. 난 출근해야하는데 통화는 밥 빨리 먹고 해라 했더니 밥상을 뒤엎더라. 내가 ‘이 사람 잘못 봤구나. 착한 오빠인 줄 알았는데 어떡하지’ 그랬다. 이미 서우 가져서 배가 불러올 때다.”
“<김광석 3집>은 내 퇴직금으로 제작한 앨범”
-소송을 많이 하셨는데.
“시아버지하고 싸움이 길어지니까 시아버지랑 나랑 돈 가지고 싸운다고 비춰진다. 음반 로열티를 제가 먼저 가져간 걸로 아는데 그게 아니다. 신나라레코드(현 킹레코드)가 문제가 많다. 신나라가 김광석씨 앨범을 어마어마하게 팔았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걸 내가 관리하려고 했다. 나는 음반 업계를 너무 잘 아니까 나한테는 돈을 안주고 시아버지한테 돈을 딱 주면서 (신나라레코드가) 싸움을 붙였다. (당시엔) 시아버지는 잘 모르니까 (김광석씨 사후에)돈만 그냥 받은 거다.”
-1993년도 김광석씨의 로열티를 김수영씨(시아버지)에게 주는 계약은 왜?
“그건 나도 당연히 알고 있었던 얘기다. 장아무개 부장이라는 신나라에 영입담당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김광석을 찍은 거다. 그때 잘나간다고 하니까 찾아왔더라. 돈을 많이 준다고도 하고 선물공세도 했다. 김광석씨가 좋아하는 엘씨디(LCD)라고 뮤직비디오 보는 레이저디스크 같은 거 가져다주고 하니까 꼬임에 넘어가서 신나라랑 계약을 한 거다. 그 다음부터 음반 계약을 하는데 김광석씨 나이가 어리고 다 현금으로 돈을 벌 때니까 세금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명의만 시아버지 이름으로 한 거다. 신나라에서는 우리한테 로열티를 현금으로 사과박스에 줬다. 사실 불법적인 돈이다. 그때 화폐가 바뀐다고 해서 급하다고 했다. 그때 신나라에서 현찰을 받아서 건물을 지었는데 나중에 세금 포탈 추적 들어올까 봐 명의를 세 명으로 나누자고 했다. 상징적인 계약으로 아버님이랑 나랑 세 지분으로 나눈 거다. 아버님이 돈을 댔다거나 아버님이 로열티를 가져간 적은 없으셨다. 그건 신나라 장아무개 부장이 확인해줄 수 있다. 그 사람이 장난 많이 쳤다. 이제 나올 때가 됐다.”
-시아버지는 애초에 명의만 빌려줬다는 건데 왜 김광석씨 사망 뒤에는 바뀌었나?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나니까 이제 욕심을 내는 거다. 나는 남편 그렇게 되고 정신이 없는데 신나라는 원래 매달 우리한테 돈을 줬는데 그냥 갑자기 아버님한테 주는 거다. 그때 세금이 5000만원 나와 있고 대출로 집을 지었기 때문에 이자도 나가야하는데 돈을 안 주셨다. 자꾸 ‘49제때 얘기하자 49제때 얘기하자’ 하더라. 어른이 얘기하니까 그냥 참았다. 나중에 정리해주시겠거니.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니까 처음에는 나한테 잘 해주시던 마음이 점점 변하면서. (1996년 4월에 시아버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는데?) 49제라고 해서 49일을 기다린 거다. 주변에서 주면 안 된다 이래라 저래라 얘기가 나왔다. 그때 저는 애 유치원 보내고 그랬다. 그게 서우가 6살이었다. 상호신용금고라고 3억5000만원에 빌린 게 있었다. 그걸로 한 달에 이자가 250만원인가 나오고 2층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원음미디어라고 거기 대표가 나였다. 거기 사무실 운영하려면 직원도 있고 경리도 있으니 돈이 필요한데 아버님이 가져가고 돈을 안주니까. 그때 진짜 통장에 돈이 없었다. 한 달에 500만~600만원은 기본으로 들어가고 애 기르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때 변호사도 알아봤는데 그때 찾아놨으면 문제가 안 생기는데, 그때도 부모님 생각해서 ‘아버님이 그냥 쓰시라’고 했다. 그때는 음반업계를 잘 알고 있었고 앞으로 낼 앨범도 기획을 하고 있었고 라이브 앨범도 있었고 그 4개 앨범(김광석 3, 4집과 다시부르기 1, 2)이 중요하다고 생각 안했다. 그래서 그 로열티를 받아가라는 거였지, 판권이나 제작, 저작인접권을 가져가라는 얘기는 아니었다.
당시 합의서 써준 변호사가 저작권법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로얄티는 (아버님이) 받으시고 나중에는 서연이한테 준다’ 그렇게 (합의)한 거다. 그때 시댁에서 5000만원 받아서 세금 내고 어떻게 무마시켰다. 그때 저는 돈이 없으니까 삼성영상사업단하고 라이브 앨범을 해서 조금씩이라도 사무실을 운영하고 유지하고 있었다. 건물을 지을 때 잘못 지어서 비가 새고 임대료도 안 나오고 그랬다.
그러곤 서우 특수교육도 시켜야하는 상황인데 아이엠에프(IMF·외환위기)가 왔다. 건물 팔고 싶은데 못 팔고 그 집을 전세를 주고 내가 일을 해서 언니가 서우를 돌봐줘야 하니까 언니가 있는 서울 방학동으로 이사를 갔다. 1997년이다. 유치원에서 서우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왕따를 당하니까 선생님이 부르더라. 수업에 집중을 못하고 애가 이상하다고 하면서 케어(보살피기)가 어렵다고 했다. 우린 이미 (서연이) 돌 때부터 ‘가부키 신드롬’이라고 애기처럼 남아있는 유전자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음반 제작 사업은 언제부터 시작했나.
“1990년초만해도 (김광석씨가) 프로 진행하는 것도 없고 동물원의 김광석이라고만 하니까 자기 이름 내세우기 어려웠을 때다. 자기도 인기를 얻고 애도 키워야하는데 걱정이 많았다. 저는 직장을 다니니까 제 돈으로 생활을 했다. 공연 나가면 항상 (나에게)고맙다고 했다.
동물원할 때 조아무개씨하고 말도 안 되는 계약서를 써놨더라. 1988년에 그냥 대학생들이니까. 한 장 팔릴 때 10원 받는 걸로. 그것도 10년이나 묶여있었다. 종이로 둘이 계약서를 끼적끼적 써놓은 걸로 붙잡혀서 앨범을 내고 싶어도 못 내고 그 사람한테서 앨범 내기도 싫고. 그걸로 변호사를 만나러 다니고 그랬다. 그 사람한테 대항을 해야 하는데 그 사람이 이미 ‘김광석이 잘나가니까 날 무시한다’면서 뒤에서 욕을 하고 다녔다. 조아무개라는 사람이 동물원을 키운 사람이니까. 광석씨가 싸워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내가 회사를 그만두겠다, 같이 음반 일을 해보자고 했다. 내가 워낙 꼼꼼하게 일을 하니까. 애 낳을 때도 됐으니까 회사를 그만뒀다. 그 퇴직금을 받아서 만든 게 3집이다. 인터콘티넨탈호텔 다녔던 퇴직금으로.
그래서 공연 때 (김광석씨가) 항상 그런 얘기를 했었다. 고맙다고. 1, 2집은 조아무개씨 거고. 그걸 뺏어오고 싶었는데 그 사람하고 계약을 엉터리로 해놨으니까. 그래서 3집을 내야하는데 계약이 아직 10년이나 남아 있는 거다. 그래서 소송 당할 걸 알면서 낸 거다. 바로 연락이 와서 10년 안됐는데 왜 앨범을 내느냐고 소송 내용증명을 보냈다.
김광석 3집에 서연이 자장가도 들어있고 자작곡도 몇 개 넣었는데 많이는 못 넣고. ‘사랑했지만’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거 넣고. 그렇게 앨범을 냈다. 내니까 바로 조아무개한테 내용증명 들어와서 김광석씨가 5000만원 주는 걸로 합의를 본거다. 그래서 그게 풀린 거다. 그때 서울음반에서 냈다. 3집이 생각보다 히트를 못 쳤다. 동물원의 김광석으로만 알려져서. 소극장에서는 그래도 인기가 있는 정도였다.
그 다음에 바로 4집이 나온 것도 아니다. 조아무개하고 관계가 딱 정리가 안됐으니까. 3집이 먼저 나오고 4집이 나와야하는데 <다시부르기 1집>을 낸거다. 그건 정규앨범도 아니고 리메이크 앨범이니까 다시 부르기만 한 거니까 거기서 뭐라고 못했다. ‘다시부르기’라는 말을 쓰자고 한 것도 나였다. 그때부터 제작자로서 매니저도 없어서 전화도 다 받고 스케줄 관리하고 혼자 다 했다.
그렇게 4집이 나왔다. 그게 본격적인 거다. 조동익이라는 장필순씨 남편이고 유명한 분이다. 베이스 하시는 분인데 그 분 팀을 모셔서 최고의 앨범이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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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서울 중구 한 오피스텔에서 가수 고 김광석씨의 부인 서해순씨를 만났다. 서씨는 김씨의 친형 김광복씨로부터 유기치사 및 소송사기 혐의로 고발돼 경찰 조사를 앞두고 있다. 서씨는 “이 모든 게 돈 때문이다. 2005년 저작권 소송 때 피고에 나뿐 아니라 딸 서연이 이름까지 올랐다”며 “더는 김광석씨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상호 기자 아줌마 잘못 건드려, 처벌받을 것”
-1990년 결혼 할 때 상황은?
“당시 김광석씨는 ‘내가 가수다, 정규 방송을 한다,’ 그런것도 아니고 생활 안정성이 없었고. 그래도 제가 과거가 좀 있어서 조건이 안 맞았지만, 착하고 하니까. 그때는 집에서는 반대했다. 아버지는 육사 7기고. 중령까지 하셨다. 엄마가 기세가 등등하시고 그랬다.”
-오빠 관련 의혹이 많다.
“오빠가 전과가 있는건 맞다. 오빠가 사회를 잘 모른다. 부잣집 아들로 자랐으니까. 오빠가 주변 여자학교에서도 유명하고. 호남형인데. 새언니도 엘리트였다. 조카들도 홍콩에서 컸다. 지금은 이혼했다. 성격이 안 맞아서. 그때부터 오빠 인생이 어려워졌는데. 혼자 있다 보니까 여자 만나면 당하고 돈 뜯기고 엄마가 가서 해결하고. 나쁜 사람은 아니다. 술 먹고 다혈질이라 싸우고 그런 거겠죠. 사기나 그런 거 할만큼 머리가 좋은 것도 아니다. 지금은 나이가 벌써 환갑이 넘었다. 나랑 12살 차이다.”
-김광석 사망 당시 상황을 다시 설명한다면.
“‘오빠가 밑에 있었네 어쩠네’ 그런 의혹을 일으키는 말을 하던데. 나는 당시 오빠가 있는지 몰랐다. 주차장에 컨테이너 집을 놓고 (오빠) 부인이 강화도에 있었는데 서울 잠깐 나올 때만 썼다. 왔다 갔다만해서 있는 줄도 몰랐고 왕래가 자주 있던 사이도 아니었다. 서우아빠가 그렇게 되니까 살려보려고 매달려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쓰러져있었으니까 술 먹고 취했나 보다 하고 깨우고 물 먹이고 우황청심환 먹이고 나 혼자 그랬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때는. 이게 아니다 싶어서 119 부르고. 오빠가 있는 걸 알면 내려갔겠지. 차라리. 그럼 더 이상한 상황이 됐을 텐데. 사이렌 소리가 들리니까 오빠가 자다가 불이 났구나 싶어서 팬티 차림으로 나와서 119 대원이랑 같이 올라온 거다. 그걸 가지고 손석희씨는 최근 인터뷰 도중 갑자기 담배가 두 종류가 있었냐 그런 걸 대본에도 없는데 물어본 거다. 그때 너무 화나서 ‘참아야지. 참아야지’ 했다. 콘티를 미리 보니까 김광석 의혹 그런 것만 있어서 처음에 안 나가려고 했다. 서연이까지 물어보면 난 죽어서 쓰러질지도 모른다고 했다. 그 인터뷰 못하겠다고 했더니 그래서 조정을 해본다고 하고 조정을 해 온건데 막상 그런 건(조정 한 것은) 물어보지도 않았다. 나중에 사진에 보니까 담배가 수두룩하게 쌓여있는데 두 대가 이렇게 있는 걸 그걸 보고 나보고 어떻게 아냐고. 정신도 없는데 어떻게 기억을 하겠나. ‘모르겠는데요’라고 답했더니 (손석희씨가) ‘그럼 누가 피운거냐’며 다그쳤다.
블루스하우스라고 그때 신동엽도 왔다 갔다고 하고 장필순, 이소라 다 모여 있다가 거기서 맨날 모이면 담배를 광석씨가 좋아하니까 이사람 담배 피우고 섞이는지 (나는 모르겠다.)”
-손석희 사장 인터뷰에 불만이 많으신데.
“이상호씨가 주장하는 것만 나한테 물어봤잖아. 그래서 화가 난다. 영화를 안 봤다면서 이상호씨가 주장하는 이상한 얘기들, 미국에 부동산이 있냐 없냐 그런 거, 그런 것만 갑자기 물어보니까 황당해서. 이거는 진짜 대답을 하는 것도 이상한데 여기서 너무 죄인처럼 보이는 것도 이상해서 (속으로) ‘막가자’ 해서 막 그랬다. 난 밑으로 떨어질 곳이 없는 사람이다. 제가 정치인이라서, 뭐 다음 선거에 나가야할 사람이면 손석희씨한테 잘 보이려고 하겠지만 난 목적이 없는 사람이다. 이미 명예가 실추됐고 이득을 취하려고 나간 게 아니기 때문에. 아줌마를 건드리면 가만히 안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줌마 건드리면 안된다. 이판사판이다. 계산을 못해. 화가 나니까. 이상한 것만 물어보니까.
앵커라는 분이 자기가 영화를 안 봤다고 하지만 팩트를 확인하고 물어봐야지. 김광석이 장난치듯 죽었다는데 왜 그랬냐고? 그때 너무 경황이 없어서 기자들에게 ‘너무 장난같은 상황’이라고 했는데 그게 와전됐다니까 또 물어보더라. 그래서 내가 ‘언제 (장난치듯 죽었다고) 그랬냐?’고 하니까 당황하더라. 참느라 혼났네. 조서에 나오는 얘기도 아니고 기자들에게 한 얘긴데, 언론인이라는 분이 조서도 확인해 보지 않고 그렇게 물어보면 되겠나. 자기 얘기 딱 끝나고. ‘서연이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하셨냐’ 그럴 줄 알았는데 날 심문하듯이 그랬다. 자기가 검사·판사라도 되는 것처럼 서류 쫙 펼쳐놓고 나는 달랑 큐시트 한 장 주면서. 앉혀놓고 ‘이거 왜 그랬냐’고 ‘어떻게 미국 가셨죠?’ ‘왜 죽을때 옆에 있었나요?’ 그런 질문으로 절 당황하게 했잖아요. 기자라면 팩트를 얘기해야하는데.
이상호씨가 주장하는 게 하나도 맞는 게 없다. 미국에 부동산 없고 누구랑 결혼해서 시민권자랑 결혼해서 간 것도 아니다. 100% 제 지분 회사, 인베스트 비자. E-2 받아서 미국에 갔다. 30만~40만 달러로 가게를 사면 5년 짜리 투자 비자 준다. 그걸로 대출받아서 간 거지. 불법자금이나 나랏돈을 끌어들인 적도 없고 세금 밀린 적도 없다. 강남 빌딩도 없고 애가 그렇게 됐는데 부동산 늘릴 이유가 뭐가 있겠나.
팩트가 하나도 안 맞는데 이상호씨 얘기만 듣고 심문하듯이 얘기를 했다. 자리가 생기면 얘기를 좀 하고 싶다. 기자라면서 의혹 제기하는데 사람들 동원하는 게 이게 정상이냐. 이상호씨 얘기는 자기는 경찰에서 부검한 것도 믿을 수 없다는 거다. 부검의 최고 권위자 분이 30년의 명예를 걸고 이건 맞다고 하는데 그 말을 안 믿으면 누구 말을 믿나. 그럼 우리나라는 도대체 누가 판정을 하냐? 이상호씨가 판정을 해주는 나라가 된 거다 지금. 20년 동안 날 괴롭힌 얘긴데. 이상호씨 또 9시간 조사 받고 나와서 ‘그런 분(부검의)들은 자기가 실수를 해도 뒤집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더라.
우리나라에 사법이 있다면 그 사람은 처벌 받아야하고 인권이 있다면 난 보호 받아야 한다. 난 이의제기를 했고 조사 중에 있다. 이 나라가 이게 나라냐. 이상호라는 사람 때문에 내가 살인자가 되어야 하고 사회적으로 완전히 매장이 된 거고. 나이 먹고 죽어서 값없는 죽음이 될까봐 지금까지는 서연이 때문에 살았는데. 서연이가 엄마가 이런 거 당하면 얼마나 슬프겠냐. 남편 없다고 이렇게 무시를 당하고.”
“2005년 소송의 피고는 나뿐 아니라 딸 서연”
-김광복씨 소송 왜 하는 것 같나.
“다 돈 때문이다. (김광복씨는) 서우를 찾지도 않았다. 1996년 1월6일 이후로 한 번도 안 찾았다. 소송을 내가 건 게 아니고 저쪽에서 아버님 돌아가시고 합의서가 있으니까 그냥 서연이한테 줬으면 끝나는 거다. 그런데 유언 증서를 가지고 바꾼다면서 그걸로 승계를 받아서 ‘원고 김광복, 이달지’ 해서 소송을 다시 냈다. 나한테만 낸 게 아니고 서연이 것도 뺏으려고 서연이한테도 냈다. 서연이가 피고다. 그래서 소송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소송이 너무 길어져서 저는 돈도 없고 회사는 망가졌고 서우는 미국 유학비가 일 년에 5000만~6000만원씩 들어갔는데 그 돈을 못 보내니까 2006년 서우를 데리고 한국에 들어와서 있었다. 김광복씨 일하는 국세청 로비에 내가 서우를 데리고 찾아갔더니 서우를 보고 놀라더라. 그렇게 서우가 안 큰거 보고. 서우 이런 상태니까 ‘조카 것 그걸 뺏어가고 싶냐’ 하면서 엎어버리려고 갔다.
데려갔더니 창피하니까 아이스크림 파는 매점에 가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주면서 왜 왔냐는 식으로 가만히 보더라. 서우 반가워하지도 않고. ‘소송이 이렇게 길어지면 난 서우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서우도 데려가고 다 가져가서 키우시라’ 했다. 그랬더니 답변도 안하고 ‘나 일 있다’고 그러면서 바쁘다는 핑계로 가버렸다.”
-2008년 파기환송심 당시 김광복씨와 조정 내용은?
“그때 완전히 끝냈어야하는데 못했다. 당시 판사가 부르더니 어차피 판결이 이렇게 됐지만 합의하는 모양새가 낫지 않겠냐고 했다. 나도 ‘그걸 내가 다 가지려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이렇게 합의하는 게 어떠냐고 해서 각각 소송비 부담하는 것으로 하고, 추모사업은 내가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으니까 추모 공연하는 부분은 (김광복씨가) 쓰실 수 있게 하고, 음반을 내는 건 절대 안된다고 썼다. 그걸 내가 그쪽에 좀 해준 거다.
추모사업도 문제가 많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것도 문제제기를 하려고 한다. 그걸로 돈을 어마어마하게 벌었다는데. 김민기 대표한테는 1억5000만원인가밖에 안줬다고 하더라.”
-왜 21년째 타살 의혹이 계속 제기되는 것 같나.
“원래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데 김광석씨는 20주기라는 전시도 하고 뮤지컬도 나오고 아직도 그 사람이 회자가 되고 그 사람 음악을 듣는 사람이 많아지니까 그런 것 같다. 또 대구에 김광석 길이 생겨서 관광객이 많이 온다고 하더라. 그게 하나의 큰 이권이랄까. 추모사업이 나라의 어떤 프로젝트로 돼서 서로 그걸 자기들이 하고 싶어 하는 거 같다. 그런 단체가 많아졌다.
대구의 김광석 사업도 내가 한 게 아니다. 내가 ‘돈! 돈! 돈!’ 하는 줄 아는데 회사가 있으니까 대응할 수밖에 없게 됐다. 법률고문하시는 분이 회사가 상표권 해야 한다고 해서 대응을 하는 거다.
음원이라는 것만 수익이 좀 있었는데 지금이야 좀 나오지만 그때는 음원수익이 있지도 않았다. 밀리언셀러라고 하지만. 1996년부터 2008년까지는 시댁에서 로열티를 가져갔다. 난 2008년 이후부터 저작인접권을 받은 것뿐이다. 저작권은 1996년부터 받았다. 한 달에 300만~400만원 받은 꼴이더라.”
“서연이랑 나 사이 동네 사람들이 더 잘 알아”
-곧 경찰 조사를 받게 된다.
“경찰이 살짝 왔었다. 내가 나와서 얘기하면 길어지니까 자료만 정리해달라고. 서우의 유학 자료들, 병원간 자료들 그런 거 정리해달라고해서 다 정리해서 드렸다. 얘기하실 거 있냐고 그래서 ‘이상호씨가 이렇게 이렇게 했다 김광복씨가 날 이렇게 이렇게 했다’ 내용 정리했고 도장 받으러 오셨더라. 부르실지는 모르겠다. 부르면 갈 건데 시끄럽게 부를 것 같지는 않다. 동네에서는 내가 서우를 어떻게 데리고 다녔는지 다 봤기 때문에 나는 알지도 못하는 단어 ‘유기치사’를 써서, 참. 애가 17살짜리인데 아주 누워있는 그런 장애가 아니다. 몸이 좀 뚱뚱하고 키가 139cm밖에 안 되는, 평범해 보이지는 않는, 중학교 1학년 정도로 보이는 학생이었지. 말할 거 다 하고 볼 거 다 보고 전화통화도 다 하고. (2007년 12월22일에) 학교도 갔다. 학교도 (경찰이) 조사를 했을 거다. 그날 학교 앞 병원에 가서 ‘애가 열이 좀 오르고 내리고 하는데 기침도 하는데 큰 병원 갈까요’ 했더니 의사가 ‘약만 먹어도 될 것 같은데요’ 했다. 약을 받아와서 약 먹였는데 애가 잠을 푹 못잤다. 경찰도 그때 조사를 다 했고. 동네 분도 만나고 학교도 조사하고 병원도 갔을 거다. 담당형사한테 ‘혹시 약이 문제있는 거 아니냐’고 얘기를 했다. 형사도 병원에 조사를 해봤겠지만 그건 아니라고 했다.
부검을 내가 반대하면 못 한다, 사실. 그런데도 부검 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마음 아프지만 부검도 한 거다. 이상호 기자도 그걸 밝히려고 한 거 같지는 않다. 하와이에 감금되어있다고 하면서 ‘하와이에 갈 거다’하고 엄청난 팩트를 안 것처럼 군건데. 그건 헛 다리를 짚은 거다. 이 사람은 영화 홍보를 하려고 법안을 발의한 거 아니냐. 안민석 의원하고 (기자회견으로) 티브이까지 나와서 그걸 국회에 가서 ‘억울한 죽음을 밝혀주십시오’ 한 거다. 그걸로 영화 홍보를 하려고 한 거다.”
-왜 강용석 변호사를 선임하려 했나.
“우리 집에서도 난리가 났다. 그런데 애를 죽였다는 혐의에 대해서 변호사 앞에서 젊어서 남자 만나서 유산한 거까지 얘기를 해야 하고. 나이 오십 넘어가지고. 내가 변호사 만나기 너무 창피했다. 회사에 고문 변호사가 있는데 그 사람한테 그걸 어떻게 얘기하겠나.
판결은 내가 문제가 없으니까 확실하다는 건 알고 나머지 이런 이상한 얘기들이 나돌면 그건 강용석이 나가서 이런저런 프로에 나가서 이렇게 얘기할 수 있겠다 생각해서 한 거다. 기자들한테 일부러 물었다. 강변호사 연락처 아냐고. 연락처 주더라. 그래서 연락 바로 했다. 오히려 그 사람은 말하기가 편하더라. 스타일이 나랑 비슷해. 다혈질이야. 말하다 툭툭툭 뭐 그런 거죠 뭐 하면서. ‘이건 문제도 없네요’ 그러더라.
내가 오래 엔터테인먼트 쪽에 있었는데. 이 건은 죄인이다 아니다를 떠나서 나를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명예 실추를 시킨 것이기 때문에 법적인 것도 그렇지만 난 이상호라는 사람을 공개사과 시키려고 한다.”
-이상호 기자는 왜 이런 의혹을 제기하는 것 같나.
“명예욕? 사회에 자기가 뭔가 대단한 걸 하고 있다고 보여주려는 것같다. 김광석 이름으로 영화 만들어서 여러 사람을 이렇게 만든 거다. 이건 망자에 대한 명예훼손이다. 만약 노무현 대통령이 부부 싸움 하다가 죽었다고 한다면 남아있는 식구들이 얼마나 황당하겠는지 생각해 보라. 이상호 기자도 김광석을 추모하려고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가까운 식구를 살인자로 만들고 그러면 안 된다. 부인을 살인자로 만들고.”
-동거남도 거론된다.
“그분도 못나오고 있죠. 조사 받을 수도 있다. 그분도 애들이 있다. 미국 영주권자고. 집안도 나름대로 부모님 다 살아계시고 왔다 갔다 한다. 제가 남편 일을 하는 걸 알기 때문에. 저는 남자를 만나려고 해도 날 다 이해해주지 않으면 만날 수가 없다. 왜 나도 유혹이 없었겠냐. 나만 보면 좋아하다가 서우를 딱 데리고 나가면 그 다음부터 연락을 안 한다. 남자들 입장에서는 서우를 데리고 오지 말라고 하지. 난 서우를 예뻐하는 사람이 제일 중요했고 그 사람이 서우를 예뻐하고 학교도 데려다주고 했으니까 그분에 대해서 좋아했던 거지. 하와이에 있을 때 가게 일도 도와줬다.
돈 문제는 100% 다 제 거고 회사도 제 거고 그게 문제가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거 문제없이 했다. 무슨 집 빌릴 때 둘이 같이 사니까 그냥 허스번드(남편)로 쓸 수 있는 거지. 그걸 가지고(보도를 다 하느냐).
유부녀도 남자 만나고 나이든 할머니도 동거하고 간통법도 없어진 마당에. 혼자된 여자한테. 표현도 엉터리로 쓴다. 동거남이 아니라 내연남이라고 쓰더라. 내연남이라는건 실제 남편 김광석이라는 사람이 지금 있는데 내가 남자를 만난 거라는 건데 그건 아니지.
아무래도 김광석씨 공연하면서 사이가 안 좋았고 김광석씨도 여자문제가 많았다. 그때 열 받아서 방송에 다 얘기했다. 작가 누구라고. 이상호 기자가 김광석씨는 여자문제가 절대 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걸 자기가 어떻게 아냐고요.”
-김광석씨가 곡을 못 받아서 힘들어했다.
“수첩에 보면 5집을 내려고 네 곡 제목을 써 놨다. 작사작곡을 하려고 애를 쓰고 노래를 받으려고 했는데 건물 지었다고 하지 돈 많이 벌었다고 하지 그러니까 돈 못 버는 통기타(가수)들이 시기를 했다. 그래서 항상 외롭고 공연장 끝나고 뒤풀이하는데 사람들이 하나도 안 왔다. 썰렁하게 뒤풀이를 하고 외롭고. 가수들은 밤에 혼자 활동을 많이 하잖아.”
-언제부터 사이가 안 좋아졌나.
“다른 여성과 주고받은 편지를 나중에 발견한 게 문제였다. (언제쯤?)김광석 사망 6개월 정도 전이다. 둘이 잠깐 만난 것만 알았지 애를 지우고 그런 건 몰랐다. 김광석씨가 거짓말을 했다. 집을 신축해서 짐을 풀고 박스 정리를 하는데 작가들이 써준 파일에 끼워져 있던 편지가 똑 떨어졌다. 그걸 없애버리지. ‘당신하고 영혼까지 같이 가고 애를 지워서 우리 애가…’ 뭐 이런 내용이었다. 이런 편지를 보는 순간 와이프 입장에서 어떻겠나. 같이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잘 살아보자고 집을 지어서 지하에다 남편 소극장 같은 거 만들어주려고 광석씨 바쁘니가 내가 관리감독 다 했다. 29살짜리 여자가 인부들 데리고 집을 지으면서 그게 쉬운 일이었겠나. 겨우겨우 보증금으로 집 지었는데 그 편지가 발견됐다. 나는 그때 ‘이제 네 노래도 듣고 싶지 않고 너란 인간은 끝났어’ 속으로 그랬다.”
-그래서 맞바람을 했다?
“그건 아니죠. 애도 있는데요. 그렇지만 이미 이미 부부사이는 끝난 거였다. (김광석씨가) 나에게 거짓말을 한 거였다. 차라리 그 여자랑 그렇다고 하면 모르겠는데 나한테 아니라고 한 거다.”
-이혼도 생각했나.
“김광석씨는 그때 인기가 올라서 여자 문제로 이혼하면 끝나는 상황이었다. 그때 (김광석과 내연관계였던) 사람은 아직도 이 바닥에서 뮤지컬 제작자로 일한다. (김광석씨는) 서우는 장애우니까 나랑 헤어지면 (자신이) 장애아 키워야할 거 같으니까 (이혼 얘기를 못 꺼냈다.) 나는 ‘이혼하면 재산 어떻게 할래. 서우 당신이 키울래? 난 돈도 다 필요없어. 나는 당신이랑 결혼할 때 당신이 유명해서 한 것도 아니고 난 당신한테 해줄만큼 해줬으니까 (상관없어)’라고 했다. 그땐 이것도 저것도 다 싫었다. 그냥 그 여자 만나서 잘 살고 서우 잘 키워라. 여권만 가방에 넣고 다니고 언제든지 떠나겠다고 했기 때문에 광석씨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는 얘를 키울 수 있을까.’ 하고
“김광석 관련 일에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아”
-그런 불화가 타살 의혹으로 번졌다고 보시나.
“타살 할 이유가 뭐가 있나. 헤어지면 되는데. 오빠가 김광석씨를 죽이려고 했다면, 타살이라면 손톱이라도 긁히고 그래야 하는데 그런 게 아무것도 없는 거다. (김광석씨가) 살려고 바동바동했으면 손톱에도 (상처가) 있어야한다. 타살이면 목을 졸렸다는 거 아니냐. (사망 당시) 서우가 가운데 방에 있었다. 그럼 애가 시끄러워서 나왔을 거고. 6살짜리 애가 가운데 방에서 자고 있었는데 시끄러우면 나오지. 자살인데 이상호 기자가 타살이라고 하니까 이런 얘기까지 나오는 거 아니겠나.
부검도 했다. 당시엔 여자는 거기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다. (김광석씨) 형, 매제들, 우리 친 오빠랑 작은 아버지도 들어갔다. 되게 많이 들어갔다고 하더라. 원래 부검은 3명만 하는데 부검의만 6명이 들어갔다더라. 관심이 많았으니까. 시댁 식구들이 이게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살이라고 나오니까 허탈해하는 표정을 본 적은 있다. 아이고 아이고 하면서. (김광복씨도 거기 들어갔나?) 네. 그분이 잘 안다.”
-앞으로의 계획은?
“저는 앞으로 김광석씨 일은 안 할거다. 김광석씨 집안이 저를 너무 이러니까. 서연이만 내거고 앞으로 김광석씨 (관련된 일)는 사단법인이든 어디든 만들어서 관리시키고 관여 안 할 거다. 서연이를 낳을 때 만든 <자유롭게>라는 곡 하나만 그 사람의 진실을 믿는 거지. 다른 곡은 누구를 생각하면서 만든 노래인 지 알 수 없어서…”
글·사진 김양진 이지혜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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