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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이야기

계약서 없는 알바인생 15년…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일산백송 2015. 11. 19. 10:27

계약서 없는 알바인생 15년…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등록 :2015-11-18 21:21수정 :2015-11-19 09:17

kimyh@hani.co.kr
어느 백화점 세일 노동자의 죽음 


백화점 행사매장은 연중 바쁘게 돌아간다. 

정기세일, 한국판 블랙프라이데이, 창립 기념행사…. 

무슨 명목이든 연중 세일인 백화점 행사매장 등에서 

지난 15년 동안 ‘붙박이’ 아르바이트 사원으로 일한 박유정(40)씨가 숨진 날도 마찬가지였다. 

박씨는 롯데백화점 부산 본점 9층 행사장에서 지난달 20일 시작된 ‘아웃도어·스포츠 특집전’에서 

일당 6만원의 일용직 판매사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행사장에서 ‘아이더’ 점퍼와 바지를 팔던 박씨는 사흘째인 22일 점심 때 백화점 화장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화장실에 간다던 박씨가 돌아오지 않자,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동료가 화장실의 잠긴 문을 열어 

그를 찾았지만 이미 숨진 상태였다. 사인은 급성 심장마비로 추정됐다.
유족과 경찰의 말을 종합하면, 박씨는 백화점 내 여러 의류 브랜드의 아르바이트 판매사원으로 일해왔다. 

그 기간이 자그마치 10여년이다. 

국어사전에 ‘아르바이트’의 정의는 ‘본래의 직업이 아닌 임시로 하는 일’로, 

‘부업’으로 순화해서 쓸 수 있다고 돼 있다. 

그의 일이 과연 ‘부업’이었을까? ‘임시로 하는 일’이었을까? 

박씨는 지난 10여년간 며칠 단위로 계약해 일하며 자신과 노모의 생계를 꾸렸다. 

특별히 일터가 바뀌는 일도 없이 주로 롯데백화점 부산 본점과 광복점에서 일했다. 

박씨의 오빠 박창언(43)씨는 

“동생은 경남 함양에서 상업고교를 졸업하고 결혼하지 않은 채 부산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롯데백화점 부산 본점에서 주로 일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롯데백화점은 고용주로서 그의 존재를 아는 체할 일이 없었다. 

연중 세일인 행사매장에서 10여년을 붙박이로 일했다 해도, 

그의 신분은 입점업체가 고용한 아르바이트 판매사원으로 ‘임시적 존재’였기 때문이다. 

롯데백화점은 박씨가 사망한 뒤에야 “우리 사업장에서 10년가량 일한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베테랑 판매사원 박유정씨
일당 6만원에 일하던 중 숨져
한 백화점서 10년간 일했건만
회사는 사고 뒤에야 ‘그랬구나’
“고용관계 아니라 나서기 어렵다”
사원 열에 아홉이 같은 처지
본사 아닌 중간관리자와 계약
산재·고용보험 혜택도 못받아
사고 나서야 뒤늦게 가입 신고
업무 관련성도 유족이 증명해야
박씨같은 시간제 인생 223만명 


당장 산업재해보상 처리가 문제가 됐다. 유족은 롯데백화점에 산재 처리를 요구했지만, 

롯데는 “안타깝지만 직접 고용관계를 맺은 게 아니라서 나서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밝혔다. 

맞는 얘기일 수 있다. 

그는 롯데 행사매장의 ‘베테랑’ 판매사원이었지만, 롯데와 고용계약을 맺지는 못했다. 


롯데백화점 부산 본점 고용 형태

롯데백화점 부산 본점 고용 형태 


박씨가 숨진 롯데백화점 부산 본점은 

매출 순위로 전국 34개 점포 가운데 서울 소공동 본점과 잠실점에 이어 3위인 핵심 매장이다.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모두 3430여명이지만, 

고용 형태를 보면 백화점이 직접 채용한 정규직은 4.3%인 150명에 불과하다.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3천명의 입점업체 판매사원으로 87%에 이른다. 

실제 롯데쇼핑의 올해 상반기 보고서를 보면 백화점은 5535명의 직원을 두고 있지만, 

점포당 160명밖에 돌아가지 않는다. 백화점 일자리는 입점업체 일자리가 10명 중 9명이다. 

백화점뿐 아니라 대형 유통기업들의 고용 창출은 ‘협력업체’로 통칭되는 입점업체 고용이 대다수다.
이런 일자리의 조건은 매우 열악하다. 

일부 글로벌 명품이나 화장품 업체들은 브랜드 법인이 직접 입점해 매장 관리자를 두고 

판매사원을 직접 채용한다. 이 경우는 4대 보험 가입 등 노동조건이 나은 편이다. 

그러나 의류 등 대개의 브랜드 법인은 백화점과 입점 계약을 맺고, 

다시 브랜드 법인이 ‘중간관리자’와 계약을 한다. 

이들은 이른바 ‘소사장’이라고 불리는데 브랜드 법인과 백화점에 여러모로 종속적인 위치다. 

수익성 압박이 큰 이들이 고용하는 판매사원은 비정규직이 대다수이고, 

아르바이트 사원이 상시적으로 포함된다. 

박준도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은 

“소사장한테 고용된 판매사원들은 경력이 임금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고, 4대 보험 가입도 잘 안된다”고 

말했다.
숨진 박씨의 통장엔 최근까지 ‘롯데부산 카파’ ‘신영와코루’ ‘나이키골프’ 등 입금 업체가 수시로 바뀌면서 

급여가 들어왔다. 

이른바 ‘헬조선’에서 흔히 벌어지는 ‘알바의 직업화’가 숨진 박씨의 인생 궤적에 그대로 녹아 있는 셈이다. 

화점 세일 매대를 따라다니는 이른바 ‘세일 노동자’인 박씨 같은 사례가 

롯데 부산 본점에만 상시적으로 200명가량 된다. 

박씨는 아이더 점주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다. 

아이더 점주는 

“우리는 구두로 (계약을) 많이 한다. 하루 이틀 일하는데 근로계약서 쓰고 하는 게 좀 그렇다”고 말했다. 

롯데백화점 관계자도 “보통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는 게 관행”이라고 인정했다. 

엄연한 불법행위다. 

고용주인 아이더 점주는 박씨에게 필수인 산재보험이나 고용보험에 가입시켜주지 않았다. 

다만 현행법은 산재보험 가입을 위한 ‘입직 신고’를 일한 다음달 15일까지 하면 되기 때문에, 

점주는 박씨의 사망 뒤 뒤늦게 신고를 했다. 

롯데백화점도 “알아보니 점주는 아르바이트 판매사원을 쓸 때 이런 신고를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번에도 사고가 없었더라면 가입 생각을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나 백화점은 이런 행태에 대해 ‘협력업체 경영 간섭은 금지돼 있다’는 취지로 모르쇠로 일관해 왔다. 

이성종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정책실장은 

“백화점은 입점업체에 기획 판촉 행사를 수시로 압박하고, 고객 응대 관리 등 

입점업체 직원을 사실상 지휘·통제하고 있는데, 

불법 고용 문제만 ‘경영 간섭’을 피하느라 개입 못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지적했다. 


최근 통계청 발표를 보면, 

8월 기준으로 비정규직이 지난해 대비 19만4000명(3.2%) 늘어 627만여명에 이른다. 

또 박씨와 같은 시간제 노동자는 223만6천여명으로 20만4000명(10%)이나 급증했다. 

‘알바 인생’을 부르는 시간제는 10년 사이에 두 배 이상 늘어날 정도로 증가 속도가 가파르다.
10여년차 베테랑 판매사원의 목숨 값은 숨질 당시 하루 6만원 아르바이트 일당을 근거로 

산정될 가능성이 크다. 

산재보험이 적용될 경우 유족급여는 긴 경력이나 숙련도와 무관하게 박씨의 당시 수입의 1300일치로

계산된다. 그나마도 재해와 업무 관련성을 증명해야 할 지난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다. 


이재욱 기자 u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