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운명 그것이 알고 싶다.

운명 이야기

[스크랩] 노석 선생님 인터뷰 글

일산백송 2015. 3. 26. 15:14

서울 돈화문 옆 역문관(易門關)

 

 

장안의 거물급 인사들이 숱하게 드나든다는 이곳은 한국 현대 역리학의 양대 거두로 꼽히는 도계(陶溪) 박재완(朴在琓) 선생의 수제자이며 명리로 일가를 이룬 ‘명인’이 운영하는

명문 역술원,

 

이곳의 주인은 노석(老石) 유충엽(柳忠燁) 선생.

그는 다른 역술인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다분한 오늘의 역술계에서도 함부로 이름을 올리지 않는 역술계의 명인.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한해가 다 저물어 가는 1992년 12월.

그의 이름은 일찍이 들었고 진즉에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그가 필자를 만나는 조건도 개인의 인터뷰가 아니라 역학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주겠다는 조건에서였다.

나이와는 달리 또렷하고 빛나는 눈동자, 상대를 쏘아보는 듯한 정기는 상대방으로 하여금 뭔가 다른 인물이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빛나는 우리 나라의 명리학은 근대에 들어와서 상당히 퇴보했어, 명리는 다른 분야와 달라서 짧은 시일 내에 발전하기 힘들어. 일제 36년간 그 귀중한 자료는 일인들이 모두 훔쳐갔고 해방이 돼서는 기독교가 들어와서 낡은 문물이라 하여 배척했거든,”

 

그는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한국인의 문화를 철저히 연구해서 밑바닥부터 확실한 일본인을 만들려는 추한 음모로, 임진왜란 때 일본의 장수 가등청정이 조선에 와서 도자기를 높은 수준에 놀라 도공을 잡아갔고 그들이 세계적인 명기(名器) ‘시바다야끼’를 만든 사실 그리고 ‘무라야마 지준’이 조선총독부의 촉탁자격으로 조사자료 제 31집, 즉 <조선의 풍수>라는 책을 만든 것을 지적한다.

일인들에 의해 우리의 것들이 가뜩이나 침체되었는데 해방 이후에는 명리학이 이른바 ‘미신’이라는 이유로 천시되고 퇴보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우리에게서 가져간 학문을 더욱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세분화해서 현재로는 오히려 우리를 앞서가고 있다고 봐야 해. 사주를 컴퓨터로 프로그램으로 개발한 것도 바로 그들이고 그 수준도 상당히 높아져 있지, 그런데 우리 현실은 어떤가, 역술인 하면 만화나 TV프로그램의 코미디 재료로나 사용하고 있으니...”

 

그가 이번에는 일본인들에게서 배울 점에 대해서 언급하기 시작했다.

 

“지난 78년 선생님의 책 <명리사전(命理辭典)>이 출판되었을 때 였어, 일본의 모 경제지 서울특파원인 ‘시마다’라는 친구가 찾아왔지. 그 친구 애기가 ‘이렇게 훌륭한 책이 한국에서 나올지 몰랐는데 일본어 번역판을 내자’는 거야 그래서 선생님과 다시 상의했어. 그랬더니 선생님 왈, ‘영국이나 미국은 상관없어. 그렇지만 일본에는 안돼.’ 하시는 거였어.”

 

도계 박재완 선생의 민족주의적인 면모를 제대로 알리는 일화라 하겠는데 그 일본 특파원은 ‘이깐데스네(안됐습니다)’를 연발하고 가더라는 것.

그런데 그로부터 9년이 지난 1989년에 그 일본인이 다시 찾아오면서 책을 한 권 내놓더라는 것이다. 그 책이 바로 <명리사전>의 번역판격인 <간명사전(看命辭典)>. 일본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일화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내용이 좋다는 <명리사전>에 문제가 생겼다.

 

“선생의 저서인 <명리사전>을 정 모씨라는 사람이 복사해서 수강생들에 잘도 팔았단 말이야. 내 생각에 하도 괘씸해서 혼을 내주려고 저작권협회에 알아보고 선생의 도장을 받으러 갔지. 그랬더니 선생님이 갑자기 말씀하시기를 ‘보나마나 자네나 내 사주만 못할 걸세. 날도 추운데 처자가 있는 사람을 유치장에 넣을 셈인가. 자네는 언제나 철이 날까. 자네나 나나 전생에 죄를 지어서 지금 이 고생인데 엄한 친구 유치장에 넣으려고 하는가’ 하시더란 말이지.”

 

유충엽 선생은 도계 선생을 친부모 이상으로 끔찍이 여겼다고 한다. 살아 생전에도 스승의 예를 깍듯이 했던 것으로 알려진 그는 지금도 도계 선생을 스승으로 둔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 저변에는 자신만이 스승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지금도 꼭 ‘선생님’ 이라는 경칭을 사용한다. 지금부터 이 글의 선생님이란 바로 도계 선생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을 독자 여러분은 염두에 두시기 바란다.

이쯤에서 도계 선생에 대해서 간략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같다.

 

도계(陶溪) 박재완(朴在琓)

 

1903년 대구 출생.

이승만, 장면, 장택상, 신익희, 이병철씨 등 당대의 명사들과 12.12사태 이후 신군부 세력들도 찾아와 조언을 구한 것으로 알겨진 그는 유년기에 곽면우 선생에게서 사서삼경을 사사받고, 19세 때 중국으로 건너가 당시 중국에서 명망높던 왕보(王補) 선생에게서 10년간 명리학을 배웠다.

해방이 되자 귀국하여 오대산, 속리산, 금강산 등지에서 명리학에 전념하였고 ‘48년부터 대전에 정착’

 

‘역학은 귀신에게 사람의 운명을 묻는 점술의 차원이 아니라 자연의 이치를 밝히고 자신을 성찰하는 학문의 하나’라고 강조했던 그는 부적이나 개명(改名)을 요구하는 역술인들을 무척 경계했다고 한다.

타계 전인 ‘89년부터는 ’박재완 은퇴‘라는 명패를 붙여 주위를 정리했고 지난 ’92년 9월 29일 새벽 4시에 타계했다.

유충엽씨는 사범대학을 다니다가 6.25때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싸우다 포탄이 터지는 바람에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운명처럼 도계 선생과 만난 것은 지난 ‘71년.

 

도계 선생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것을 항상 마음 아파하는 그는 지난 ‘93년 도계 선생이 생전에 본 사주 5천장을 모아 국문과 교수 두 어명이 감수를 한 끝에 <도계실관(陶溪實觀)>이란 제목으로 출판하는 등 지금도 스승의 유지를 받드는 데 진력하고 있다.

 

‘환혼동각(還魂洞閣)’

 

“선생님이 생전에 말씀하신 말 중에 ‘환원동각’이라는 것이 있어. 한날 한시에 태어났는데 한 사람은 고리대금업자의 자손으로 태어나고 또 한 사람은 교육자의 자손으로 태어났다면 조상의 삶과, 성장기에 무엇을 배웠느냐에 따라 운명은 달라지는 게야.”

독자를 위해서 환혼동각론에 대해서 조금 더 언급하자면 이렇다.

 

우선, 환(環). 생로병사와 희노애락은 인간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혼(魂). 자신의 운명은 반드시 조상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동(動). 사람의 운명은 태어난 시대에 따른다.

       각(覺). 인간의 깨달음이 이를 극복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즉, 환혼동각의 의미는, ‘인간의 삶의 법위는 자신이 스스로 결정 할수 있지만 범위에서 느끼는 행복과 슬픔은 결국 동일하다’는 것이 된다.

그는 명리의 중요성과 근본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명리는 카운슬링으로 만든 것이야. 방향 제시를 해주는 학문이라 이거지. 내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할까. 선생님은 지난 ‘78년과’79년에 김재규에게 이르기를 ‘차를 조심하라’고 했는데 김재규는 자신의 차를 운전하는 기사를 무사고 5년 경력의 새로운 사람으로 바꿨어. 그런데 김재규가 진짜 조심했어야 할 것은 바로 차지철이었지, 바로 그런 이야기야. 그것이 천기누설이고...”

 

그가 괘를 뽑을 때는 <초씨역림(焦氏易林)>을 사용한다.

<초씨역림>은 당나라 초기 사람 초연수가 펴낸 책으로 춘추전국시대의 고유명사가 많이 나와 한학(漢學)에 깊은 학문이 있기 전에는 결코 쉽게 읽을 수 없을뿐더러 이해하기도 어려운 책.

그는 명리를 하려면 기본적으로 한학에 충실하여 웬만한 서적은 원문(原文) 그대로 볼 수 있는 실력이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일본말로 된 번역서만 읽어서는 그 심오한 의미를 결코 쉽게 얻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그런데 한글 세대인 젊은 친구들이 명리깨나 한답시고 목에 힘주는 모습을 볼때 그의 심정이 어떠할 것인가.

다시 때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 유패되기 전, 당시 그는 국외 망명설까지 나돌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놓여 놓여 있었다.

평소 그의 사주를 알고 있었던 유씨가 바로 그 초씨역림으로 패를 뽑아 계사년 하반기 그의 운세를 살펴보았다.

        ‘삼리포서(三狸逋鼠) 차우아전(遮偶我前)

        사어외역(死於外域) 불능탈주(不能脫走)’

-세 마리의 이리가 쥐를 포위하고 내 앞길을 막으니 죽을 수도 없고 외국으로 도망갈 수도 없다. -

기가 막힌 괘가 아닐 수 없다.

 

“3개월이나 6개월 단기교육을 받아서 역술원 차리는 것은 ‘사기사’만드는 것에 불과해. 그리고 개명을 한다고 운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야. 효과도 없는 것을 가지고 이름을 고치라고 한단 말이야.

역술인은 인허가 규정이 있는 것이 아니야. 하물며 운전을 하려고 해도 면허가 있는데 남의 운명을 봐주는 일을 하면서 면허를 발급하지도 검사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야.”

 

유충엽씨는 그런 사이비 역술인의 병폐를 한 가지 예로 들었다.

 

“전에 한 부인이 나를 찾아 왔었어. 다른 역술인을 찾아 갔더니 그 부인에게 ‘남편이 서북 방향에 여자를 숨겨두었는데 부적을 갖지 않으면 그 여자가 집으로 들어설 것’ 이라고 말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부인이 남편을 미행도 하고 나중에는 신경과에서 정신치료까지 받고 한 모양이다. 그래서 그 최면을 풀어주는 일부터 해야 했는데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데에 문제가 있어.”

 

역술계의 풍토가 흐려지는 이유 중 하나는 역술인 스스로가 갖고 있다는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지난 ‘87년 대선 때에는 고향 후배가 경찰 정보과에 있었는데 그 친구가 간판달고 역술원하는 데를 뒤져보니까 백운학이라는 이름이 열아홉 명이 나왔다는 거야.”

 

백운학은 흥선대원군 때 사람으로 상학(相學)의 대가. 고종이 왕이 될지 미리 알고 나이 어린 고종에게 큰 절을 올렸다는 전설적인 실존인물. 그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역술원을 개업했다는 것은 그만큼 무원칙하고 무소신하다는 말이 된다. 똑같은 열아홉 명의 백운학이라니...

 

사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출생시

 

“역술인들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사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시야. 일란성 쌍둥이도 서로 운명이 다를 수 있고 우리가 자시, 축시, 인시, 묘시 하는 두 시간 단위의 시도 초(初), 정(正), 말(末), 지장간(支藏干)으로 세분해서 나누면 더 정확해지는 것이니...”

 

생전의 도계 선생이 중요시했던 것 중의 하나는 바로 출생시에 관한 것이었다.

 

먼저 시변경론(時變更論).

 

이제는 상당히 많은 역술인들이 이 서변경론을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고 그렇게 적용한 이후로 더욱 적중률이 높아졌다고 토로하는 내용인데 여러 번 언급한 바 있어 상술은 약(略)하겠으나 일본의 동경 포준시를 사용해서는 안 되고 한국의 표준시를 찾아야 한다는 것.

또 한가지는 동경 표준시의 적용문제로 1948년부터 1951년. 그리고 1955년부터 60년까지는 섬머타임의 실시로 1시간이 앞당겨져 있으므로 실제로 출생시를 구할 때는 다시 한 시간을 제외해야 한다는 것.

출생시의 문제를 과학적으로 해석한 도계 선생의 업적은 바로 이런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충엽씨는 오래 전부터 회원제를 고수해 왔는데 지난 25년간 발행한 회운수가 이제 10만장에 이른다고 하니 상당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그는 또 사외 각처에서 활약하고 있는 젊은 인사들을 대상으로 명리를 가르치고 있기도 하다. 소수정예로 구성된 이 강좌는 바로 역문관에서 실시되는데 특정한 사람의 성격이나 사회적인 지위 등을 보고 역으로 사주를 추적하는 등 그 수준이 상당히 높은 것도 특기할만한 사실이다.

그가 역문관의 문을 열고 명리를 벗삼아 역술을 펼쳐온 것도 이제 30여년. 이제 당연히 명인의 반열에 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점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까.

 

“명인? 용신과 격국 그리고 통변까지 마치려면 적어도 30년은 해야 하는 것이야. 이제 시작일 뿐이지.”

 

역문관의 유충엽 선생.

 

국가관이나 개인관이거나 철저한 신념으로 사는 사람. 날카롭고 비판적인 의식 이래로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

그의 말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고 비판적이지만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

그는 한국의 명역술인을 모아 책을 내겠다는 필자의 말을 듣고 ‘그렇다면 그 역술인들을 어떻게 선별할 것인가’묻고 ‘잘못하면 적덕(積德)은커녕 적악(積惡)을 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경고를 한바 있다.

불편한 몸에도 불구하고 서예가를 능가할만한 서체를 구사하는 그는 문장역도 대단하여 <월간 역학>지에 빼어난 글솜씨를 선보인적도 있지만 최근에는 시사월간지 <윈(win)>에 역문관 야화를 연재하고 있다.

**************************************易術의 名人을 찾아서----중에서

 

* 노석 선생님께서는 몇 해전에 작고하셨답니다.

출처 : 고려기문학회(학선의 기문둔갑 학당)
글쓴이 : 동해안선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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