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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 이야기

연쇄살인범 유영철에 어머니-아내-4대독자 아들 잃은 고정원씨의 삶

일산백송 2015. 2. 17. 14:08

아래 글은 

최근 실력있는 역술인들을 찾는다며 방영된 이영돈PD가 간다라는 프로에서 

그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 제시한 것이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의 사주이고

이로 인하여 다시금 부각된 그 사건인데  

그사람 때문에 온가족을 잃은 한 피해자에 관한 삶을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유영철이라는 단어를 치다보니 

이 글이 검색되었고 감동이라서 이처럼 옮겨 보고자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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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범 유영철에 어머니-아내-4대독자 아들 잃은 고정원씨의 삶
동아일보 입력 2010-06-12 03:00:00 수정 2012-01-05 12:22:50 


내 손으로 낮춘 담장 그 담 넘어 온 살인마
말라붙은 가족 핏자국 겨우 눈물로 닦아냈다
밤마다 한강서 자살생각 화 치밀때는 성경 베껴
유영철 양자로? 오보요! 그의 아들 거두려 했을뿐
용서했다고 말했지만 이것이 옳은 일인지…

“미안해 여보!… 환갑선물 못줘서”

일러스트레이션=김수진 기자

한참을 기다려도 아내는 오지 않았다. 

약속시간인 오후 6시가 훌쩍 넘었지만 아내는 아예 전화도 받지 않았다. 

땅거미가 짙게 깔리고 가로등에 하나씩 불이 켜졌다. 

“당신 퇴근할 때 맞춰 나갈게요. 같이 한의원에 들러 화분에 거름 줄 한약재 찌꺼기 좀 받아와요.” 

출근길에 아내가 했던 말이 귓가에 생생했다. 

그는 살짝 짜증을 내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담장 안으로 아내가 타고 다니는 구형 그랜저 승용차가 보였다. 

“집에 있으면서 왜 안 나와?” 

초인종을 눌렀지만 반응이 없었다. 크게 어머니를 불렀다. 

퇴근 무렵이면 늘 아내와 함께 저녁 준비를 하던 어머니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담을 넘어 마당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섰다. 


벽난로 앞에 웅크린 검은 물체. 

그것이 아내(당시 60세)의 주검이란 것을 알아챈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방에서 피비린내가 몰려왔다. 

계단을 정신없이 뛰어 올라갔다. 4대 독자였던 아들(당시 35세)의 모습은 더 처참했다. 

다시 계단을 내려오니 화장실 앞에 쓰러진 어머니(당시 85세)가 보였다.

1심 판결문은 그날의 상황을 무미건조한 문체로 이렇게 기록했다. 

“피해자의 목에 잭나이프를 들이대고 2층 복도로 끌고 올라와 해머로 머리를 내리쳐 쓰러뜨린 후 

두개골이 부서져 뇌가 빠져 나올 정도로 머리를 수 회 내리쳐….” 

2003년 10월 9일. 

고정원 씨(68)는 살인마 유영철의 손에 어머니와 아내와 아들을 떠나보냈다. 

2층 아들 방에 켜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어느 목사의 설교가 사이렌처럼 귓가에 윙윙거렸다.

“가족의 말라붙은 핏자국을 닦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시오?” 한숨을 쉬며 그가 물었다. 

“그 흔적은 눈물로만 닦을 수 있어요.” 그는 눈을 감았다. 

아내의 환갑 선물로 그가 준비했던 것은 새 승용차였다. 

15년 된 자동차는 자꾸만 고장이 났다. 

그동안 사업으로 번 돈도 적지 않았지만 땀 흘려 번 돈으로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었다. 

어느 기업체 빌딩 경비원으로 취업해 한 달에 100만 원씩 꼬박 3년을 모았다. 

“이제 조금만 더 모으면 되겠지” 했던 것이 평생 전해주지 못한 정표(情表)가 되고 말았다.


“살인마 용서하다니”… 멀어져간 두 딸
그는 아내에게 용서를 빌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손수 집을 지으며 담장을 낮추자고 우긴 건 그였다. 

“내가 예전에 고학하던 시절에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신문을 돌렸는데 

장면 전 국무총리 저택이 참 부러웠어요. 나도 나중에 성공하면 저런 집에 살아야겠다. 

그런데 이웃들과 얼굴을 마주볼 수 있게 담은 좀 낮춰야겠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는 담 높이를 120cm로 정했다. 

그 담을 넘어 유영철이 들어왔다. 


“그게 1982년이었지 아마.” 

한참 입을 떼지 못하던 그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와 아내는 성당에서 부부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했다. 

그때 서로에게 유언장을 썼다. 

아내를 묻은 뒤 유품을 정리하다 그 유언장을 보게 됐다. 

“여보 나 죽기 싫어. 어린 아들과 딸 잘 부탁해.” 힘겹게 억눌러온 숨이 차올랐다.

처음엔 모든 것이 두려웠다. 

원한에 의한 범행인지 돈을 뺏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잘못한 일은 없는지 애써 기억을 더듬어 보기도 했다. 

길을 나설 때마다 온몸이 떨렸다. 

살인범이 곁에 있지는 않은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도 가족을 잃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이내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두려움은 슬픔으로 바뀌었다. 

음식도 먹지 못했고 잠도 들지 못했다. 

밤마다 한강을 찾았다. 

다리 위에서 몇 시간씩 시커먼 물을 내려다보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제 그만 뛰어내리자, 아니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하자.” 

하루에도 수만 번씩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고통이 이어졌다. 

울고 소리를 지르다 아침 햇살을 맞는 일이 반복됐다.

시간이 흐르자 조금씩 생각이 달라졌다. 

“살아남은 두 딸과 손자 손녀들은 어떡하나. 하느님이 저 아이들을 보살피라고 날 살려주신 게 아닐까.” 

발길을 끊었던 성당을 다시 찾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아내와 아들을 잃었던 집을 팔았다. 

하지만 아내의 손길이 묻은 자동차는 차마 남의 손에 넘길 수 없었다. 

“타지도 않는 그 차가 아직도 집 지하주차장에 있어요.” 그는 메마른 침을 삼켰다.

9개월이 지난 뒤 유영철이 잡혔다. 

이 연쇄살인마가 자신의 가족도 죽였단다. 

한편으로 안도감이 들면서도 한편으로 “왜 우리 가족이 이 고통을 받아야 하나” 하는 분노가 커졌다. 

화가 치밀 때마다 성경을 베끼기 시작했다. 

구약성경을 세 번 썼고 구약과 신약을 합쳐 한 번 썼다. 대학노트 20여 권이 쌓였다. 

그제서야 아주 조금 마음이 가라앉았다. 

성경 필사로 성당에서 받은 상금을 모두 유영철에게 영치금으로 보냈다. 

“저는 추호도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숨쉬는 동안 평생 사죄하며 살겠습니다.” 

유영철이 짧은 답장을 보내왔다.

“살인자가 나쁘지, 그 자식이 무슨 죄가 있겠소. 유영철을 용서했다고 말한 것은 

그 아이가 아비 없는 자식으로 키워지는 것이 가여워서요.” 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계속되는 보도로 유영철에게 아들이 있고 그 아이가 자신의 손자 또래라는 것을 알았다. 

용서’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자 그는 유명세를 탔다. 

‘유영철을 양자로 삼기로 했다’는 기사도 나왔다. 

“그건 기사가 잘못 나간 거요.”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 가족을 죽인 원수를 어떻게 아들로 삼겠소. 

그 아이가 불쌍해 양자로 거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말이 와전된 거요.” 


종교생활을 하다 조성애 수녀를 만나면서 사형제 폐지운동이란 걸 알게 됐다. 

2007년부터 사형 폐지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다가 

‘원수를 용서한 성자(聖者)’라는 뜻하지 않은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두 딸과의 관계는 점점 멀어져 갔다. 

두 딸에게 아버지는 ‘어머니와 동생을 죽인 살인마를 너무 쉽게 용서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살인마를 용서한다면 우린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겠어요.” 

후유증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두 딸은 울부짖었다. 

“할아버지가 용서했으니 유영철이 감옥에서 나와 나도 죽이러 올 거예요.” 

어린 손자가 내뱉은 말도 가슴속에 가시가 돼 박혔다. 사형제 폐지운동도 거리를 두게 됐다.


“영화 ‘밀양’… 내 마음과 똑같습디다”
그는 2008년 ‘용서’라는 다큐멘터리 영화에 출연한 뒤로 최근 2년간 언론 보도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궁금했다. 

“유영철을 죽여선 안 된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유영철도 인간입니다. 그의 목숨을 빼앗기보다 감형 없는 종신형을 살게해 평생을 반성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는 이 짧은 한 마디를 하면서도 수많은 생각이 오가는 듯 몇 번이나 숨을 골랐다.

“영화 ‘밀양’을 보셨습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소재로 

‘인간의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영화가 내 마음과 똑같습디다. 내가 용서했다는 말을 내뱉으면서도 진정 용서를 한 것이 맞는지, 

고해를 하고 성경을 베끼면서도 이것이 과연 옳은 길인지…” 

7년간 눈물도 다 메말랐다는 그의 눈가에 살짝 물기가 배어들었다. 

그가 사는 33m2 남짓한 오피스텔 창틈으로 스며드는 햇살은 아플 만큼 눈부셨다. 

그 햇살을 받은 커다란 사진 속에선 여섯 가족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범죄 억제 증명 안됐는데… 죄 밉지만 사형 안됩니다”▼ 


■ 사형제폐지운동 나선 사람들
“당신 검찰 앞잡이지? 적당히 재판해서 나 사형시키려는 거지?” 

키 160cm도 안 되는 깡마른 체구의 20대 청년이 살기를 띤 눈으로 30대 후반의 사내를 노려봤다. 

“있는 놈들은 배불리 먹고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는 관심도 없지 않나.” 

청년은 독설을 퍼붓더니 그를 외면했다. 

1975년 10월 서울구치소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마주쳤다. 

한 사람은 연쇄살인범 김대두(당시 26세), 

다른 한 사람은 한국사형제폐지운동의 대부(代父) 이상혁 변호사(75)였다.


“희대의 살인자도 죄 뉘우쳐”
그해 8∼10월 전국은 공포에 휩싸였다. 

정체모를 살인마는 서울 경기 전남 등지를 오가며 아무 집이나 들어가 

생후 3개월 된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무차별적으로 살해했다. 

김대두는 모두 17명을 살해한 끝에 세탁소 주인의 신고로 붙잡혔다. 

그는 “어른은 내 얼굴을 기억할 것이고 어린아이는 귀찮아서 죽였다”고 진술했다. 

김대두는 좀체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국선변호를 맡은 이 변호사는 꾸준히 그에게 접견신청을 했다. 

우스갯소리로 마음을 달래고 친형처럼 조언도 했다. 

김대두는 서서히 변해갔다. 

종교를 가졌고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다음 해 12월 28일. 

마지막 순간에 피해자들을 위해 기도한 김대두는 웃는 얼굴로 사형대에 올랐다. 

그는 “지은 죄를 깊이 뉘우친다. 전과자에 대한 사회적 냉대가 시정되었으면 한다”는 유언도 남겼다.

김대두와의 만남은 이 변호사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변호사는 “이 사건을 통해 아무리 끔찍한 살인마라도 충분히 교화할 수 있고 

이들 하나하나도 소중한 목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1989년 한국사형제폐지운동협의회(사폐협)를 만들어 본격적인 사형제폐지운동에 나섰고 

지금도 사형수들을 위해 교화활동을 벌이고 있다.

한국, 13년간 집행 안해 ‘사실상 폐지국’
한국은 1997년 12월 사형수 23명을 사형 집행한 뒤 13년간 사형 집행을 하지 않아 

국제사회에서 ‘사실상의 사형제 폐지국’으로 분류돼 있다. 

이는 정부가 국제사회의 여론을 고려한 탓도 있지만 사형제 폐지를 요구하는 시민단체의 목소리가 

꾸준히 커져온 것도 작용했다. 

사폐협을 비롯해 천주교와 개신교, 불교 등 종교마다 사형폐지 운동을 이끄는 단체들이 있어 

사형폐지운동에 힘을 싣고 있다. 

이영우 천주교서울대교구사회교정사목위원회 위원장은 

“객관적인 억제 효과도 증명되지 않는 상태에서 사형집행을 한다면 생명을 존중해야 할 

국가의 책무에 위배되는 일”이라며 

“죄는 밉지만 그래도 사형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직 국내에서 사형제 폐지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눈앞에 둔 정부는 

사형 집행 대신 사형수들을 엄격히 격리 수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57년 만에 형법의 전면 개정을 추진하고 있는 법무부는 사형제의 존폐 여부를 논의 대상에서 배제했다.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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