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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가고 제주는 안 간 尹 대통령의 '공간' 선택

일산백송 2023. 4. 4. 20:24

대구는 가고 제주는 안 간 尹 대통령의 '공간' 선택

[이모저모] 尹의 4.3 추념식 불참이 보여주는 정치적 모순

한예섭 기자  |  기사입력 2023.04.04. 05:41:52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

지난 해, 말 많고 탈 많던 대통령 집무실 이전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논란이 따른 말이었지만, 문장을 조금만 바꾸면 해당 발언도 어느 정도 앞뒤가 맞는 말이 될 수 있다. 가령 '공간이 의식을 보여준다'는 말이라면 어떨까. 정치인의 모든 행위가 하나의 상징으로 작용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치인이 선택한 공간도 그의 의식을 해석하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다.

대통령이 선택한 용산에서 누군가는 '소통'에의 의지를, 누군가는 '반 문재인'이라는 전략을 읽어낸 것처럼 말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선택하고 윤 대통령이 동의한 긴자의 오므라이스 노포는 어떤가. 대일외교의 성과나 정당성에 대한 가치판단을 떠나, 적어도 윤 대통령은 그 공간이 일본과의 친교와 그 친교가 가져올 긍정적 미래에 대한 하나의 상징 공간이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 

"같은 행사에 매년 가는 것에 대해 적절한지 고민이 있다" 

지난 2일 대통령실 관계자가 윤 대통령의 '4.3 희생자 추념식' 불참을 설명하며 남긴 말이다. 지난해 4월 당선인 신분으로 추념식장을 찾았던 윤 대통령은 제주, 더 정확히는 4.3 과거사 현장 제주를 대통령의 공간으로는 선택하지 않았다. "희생자들의 넋을 국민과 함께 따뜻하게 보듬겠다는 약속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라는 추념사를 전달했을 뿐이다.

반면 윤 대통령은 지난 1일 대구 서문시장 100주년 기념식에는 직접 참석했다. 공교롭게도 서문시장은 보수 정치인의 성지로 꼽힌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당선 직전 방문을 시작으로 같은 해 4월 당선 직후, 같은 해 8월, 지난 1일까지 네 차례에 걸쳐 서문시장을 찾았다. 작년 8월과 올 4월엔 모두 시기적으로 당정 지지율 하락 이슈가 겹쳐있었다.

일각에선 대통령의 대구행과 추념식 불참을 비교하는 지적이 따른다. '대구는 가면서 제주는 안 간다'는 이야기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3월 당시에는 제주, 부산, 대구, 대전 등을 훑으며 차례로 방문한 바 있다. 올해는 추념식 주최 측의 요청이 여러 번 있었음에도 비슷한 시기에 대구'만' 갔다 왔으니, 그런 비교가 부자연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역시 추념식에 불참한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시급한 민생 현안"을 불참의 이유로 들었지만, 서문시장 100주년 기념식을 시급한 민생으로 보기도 힘들다. 보수의 성지라는 유명에 맞춰 지지층 결집 의지를 읽어내는 게 좀 더 자연스럽다. 윤 대통령의 멘토로 알려진 신평 변호사조차 윤 대통령의 이번 대구행을 두고 "자기 지지층을 향한 구애"라 지적했다.

대통령실은 "같은 행사에 매년 가는 것이 적절한지" 고민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달 여권에선 그런 고민이 사치로 보일 만큼 명백히 부적절한 '4.3망언'이 터져 나왔다. 국민의힘 태영호 최고위원은 전당대회 후보 시절이던 지난달 13일 제주 4.3 평화공원을 찾아 "4.3은 명백히 김 씨 일가에 의해 자행된 만행"이라 말했다가 4.3희생자유족회 등 관계자들의 강한 빈축을 샀다. 과거사 해결을 위한 국가기관 진실화해위원회에는 과거 '4.3은 공산세력 폭동'이라 주장한 김광동 위원장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1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열린 '서문시장 100주년 기념식'에 입장하며 대구시민들과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난 공무원도 할 수 없고 은행원도 할 수 없어, (4.3 유족들은) 이런 생각으로 살았거든요"

지난달 18일, 제주 4.3 세계화 프레스투어 만찬장에서 강병삼 제주시장이 직접 소개한 가족의 일화다. 이날 강 시장은 지난 1948년~1954년에 걸친 제주 4.3 당시 이른바 '빨갱이'로 몰려 죽은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오히려 "(빨갱이의 후손이기 때문에) 공무원도 은행원도 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가지고 살아야만 했다고 말했다. 

제주 4.3과 관련한 일련의 사태는 1954년 종결됐지만, 4.3 이후 오랜 시간 제주를 지배한 연좌제의 공포와 레드콤플렉스는 4.3 이후의 이후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국정부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발간하고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희생" 사실을 인정한 때가 지난 2003년이다. 반대로 말하면 최소 2003년까지 반세기 가까운 시간 동안 제주는 3만여 명의 희생자를 낳은 과거사를 인정받지 못했다. 

제주4.3화해보고서 등 진상규명운동사 기록물들은 그 역사가 불인정을 넘어 '탄압'이었다고 밝힌다. 실제로 4.3 진상규명 운동이 처음 시작된 시기는 1960년 4.19 혁명 직후였지만, 이듬해 일어난 5.16 군사쿠데타로 4.3은 다시 20여년의 '침묵의 시기'를 보냈다. 이문교, 박경구 등 60년 발족한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 활동가들이 61년 구속됐고, 역시 60년 '특공대 참살사건'의 진상규명을 호소한 남제주군 모슬포 유가족들도 61년 경찰에 연행됐다.

1954년 구좌읍에서 발생한 '아이고 사건'은 긴 침묵의 시기를 드러내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학살터에서 '아이고' 소리를 내며 눈물을 보인 마을 주민들이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당한 사건이다. 당시 연행된 이장 등은 다시는 울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났는데, 주민들이 눈물을 흘린 초등학교 운동장에선 그 5년 전인 1949년에 마을 주민 436명이 총살당했다. 4.3이 인식 전환기를 맞은 건 1978년에 이르러 소설가 현기영이 4.3 소재 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하면서였는데 당시 그 역시 정보기관에 연행된 바 있다. 

지난달 19일 구좌읍 학살터에서 기자들에게 아이고 사건을 소개한 김남훈 제주4.3기념사업위원회 평화기행위원장은 "결국 4.3(진상규명운동)은 기록 자체가 투쟁"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여당 최고위원의 최근 발언과 진실화해위원장의 이력 논란에서 확인할 수 있듯 4.3을 둘러싼 기록투쟁은 지금도 현재진행중이다. 

오영훈 제주도지사는 이날 있었던 라디오 인터뷰에서 "태영호 의원이 최고위원 선거 과정에서 (4.3 폄훼 분위기를) 촉발했고, 과거사 문제 해결 전반에 대한 보수진영의 새로운 공격이 시작됐다"라며 "윤석열 대통령께서 오늘 참석하셨으면 이런 문제들이 해소가 됐었을 텐데 그러지 못한 게 아쉽다"고 평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3일 오전 제주시 명림로 4·3 평화공원에서 열린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추념사를 대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제가 당 대표 권한대행 시절에도 4.3 평화공원을 참배했다" 

윤 대통령, 주호영 원내대표와 함께 이번 4.3 추념식에 불참한 김기현 대표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추념식 불참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전날 대통령실 관계자 또한 윤 대통령의 추념식 불참에 대해 "지난해 당선인 신분으로 참석"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애매한 설명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제주는 당선인과 권한대행 시절에는 갈 수 있지만, 대통령과 당 대표 시절에는 방문이 꺼려지는 장소가 된다. 

윤 대통령의 네 번째 대구행, 김재원 최고위원의 거듭된 전광훈 러브콜 등 최근 여권이 여권 내에서도 뒷말이 나올 만큼 지지층 결집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과거사 해석은 진영결집의 중요 요소로 꼽힌다. 얼핏 '구중궁궐 청와대'를 고사한 지 6개월 만에 지지율 하락 이슈와 함께 소통의 상징이었던 도어스테핑을 중단한 과거 사례가 겹쳐 보이기도 한다. 

윤 대통령은 이날 추념사에서 "희생자들과 유가족의 명예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생존 희생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잊지 않고 보듬어 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여권 내 이슈로 "고통과 아픔"이 계속되고 있는데 '대구는 가고 제주는 가지 않은' 윤 대통령의 동선은 해당 추념사와는 분명 어긋난 데가 있다. 용산이라는 공간이 그랬듯 제주라는 공간도 윤 대통령식 정치의 '모순'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자리매김 해버리지는 않을까, 우려가 드는 이유다. 

그 모순의 핵심 재료가 정말로 '지지층 결집'이라면 앞서 수정한 인용 문장을 조금 더 꾸며볼 수 있겠다. 가령 '지지율이 의식을 지배하고, 공간이 그 의식을 보여준다' 정도의 말이라면 어떨까. 

▲윤석열 대통령이 1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2023 프로야구 NC 다이노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개막전을 앞두고 시구를 연습하고 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