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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 이야기

‘운명’ 배워 ‘운명’ 을 바꾸는 사람들

일산백송 2021. 11. 7. 01:29

‘운명’ 배워 ‘운명’ 을 바꾸는 사람들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8.12.31 00:00
    퇴직·실직 남성 ‘역술 학습’ 열풍…새내기 역술인 ‘창업’ 줄 이어역술을 배우는 사람이 늘고 있다.
  • 세기 말 혼돈 속에서 자기 운명을 알고 싶은 사람뿐만이 아니다.
  • 명예 퇴직 또는 실직 이후 재취업 방편으로 역술을 공부하는 사람도 속속 늘고 있다. 세기 말과 경제난이라는 현실이 합쳐져 새로운 풍속도를 낳은 셈이다. 역술 학습 열풍, 과연 그 실태는 어떠한지 현장을 둘러본다. 또한 최근 몇 년 사이 역술계에 입문한 ‘새내기 역술인’ ‘사이버 역술인’들을 통해 역술 창업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짚어 본다. <편집자>

    정성남씨(41)가 다니던 무역 회사를 그만둔 것은 지난 6월이었다. 그가 사표를 쓰게 된 직접 이유는 회사의 부당한 지시였다. ‘부하 직원 살생부를 작성하라.’ 차장 진급을 코앞에 둔 그였지만 그 지시를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한 집안의 가장이 의협심만 앞세울 수는 없는 일. 그가 눈 딱 감고 밥줄을 놓을 수 있었던 것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97년 4월부터 정씨는 하락이수(河洛理數) 권위자인 만석 서정기 선생 밑에서 주역을 공부했다. 하락이수란 북송 때 철학자 진단이 체계화한 주역의 한 갈래이다. 주역을 크게 의리학(義理學)과 상수학(常數學)으로 나누는데, 이 중 상수학을 발전시켜 운명학으로 정립한 것이 하락이수이다.

    대학에서 동양 철학을 전공한 정씨는 ‘도저히 끊을 수 없는 학문에 대한 갈증’ 때문에 직장 생활 틈틈이 하락이수를 공부했다. 그러나 ‘운명이 이렇게 풀린 이상’ 정씨는 과감하게 전업을 시도하기로 했다. 주역 공부는 계속하되, 배운 것을 응용해 밥벌이를 삼기로 한 것이다. 정씨는 올해 안에 ‘돈암주역연구원’(가칭)을 차릴 생각이다.

    정씨 같은 역술인 지망생이 최근 늘고 있다. 현재 일반인이 역술을 배우는 경로는 크게 네 가지. 첫째, 한국역술인협회·대한맹인역리학회 같은 역술인 단체가 운영하는 학원을 다니는 것. 둘째, 신문사나 백화점이 운영하는 문화센터에서 강좌를 듣는 것. 셋째, 경기대·동국대·한양대 사회교육원 등에 등록하는 것. 넷째, 이름 있는 역술인 밑에서 지도를 받는 것이다.

    지난 12월18일, <동아일보> 문화센터 501호실. 오전 10시가 되자 ‘생활 역학’ 강의를 들으려는 수강생들이 몰려들었다. 이곳 강의실을 둘러보면 문화센터가 ‘유한 마담’들이나 몰려 다니는 곳이라는 선입견은 단박에 깨지고 만다. 수강생 50여 명 가운데 여성은 불과 7명. 나머지 대다수는 50∼60대 중후한 노신사들이다.

    수업은 육갑 짚기와 함께 시작된다. 손가락 마디로 12지지를 짚으며 합(合)·충(沖)·살(殺)을 외우는 노신사들의 표정은 진지하다. 3개월 초급 과정이 끝나가는 만큼 손가락 마디를 짚는 모습 또한 그럴듯하다. 이 날 수업 주제는 12지지살. “시대 변화에 따라 살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살(地殺)이 끼었으니 올해는 북방으로 가면 좋지 않다는 점괘 따위는 농경 시대에나 통하던 것입니다.” 강사의 설명을 수강생들은 열심히 공책에 받아 적는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역학 과목 수강생은 절반 가까이가 여성이었다고 <동아일보> 문화센터 강사 정헌주씨(경기대 출강)는 말한다. 그런데 올 들어 40∼60대 남성 군단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문화센터가 개설한 관상학·기문둔갑·풍수지리 강좌도 사정은 비슷하다. 대부분 실직 또는 명예 퇴직자인 이들 수강생 가운데에는 전직 은행 간부·경찰·교장도 섞여 있다.

  • 역술인은 정신 치료사?

    ‘임상 경험’이 풍부하지 않은 것도 새내기 역술인들의 발목을 잡는 대목이다. 한 달 전 경기도 부평에 철학원을 차린 구승모씨(50·인정주역연구원장) 또한 첫 손님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그의 첫 손님은 스물여섯 살의 아리따운 여성. 곧 결혼할 예정이라는 그 여성과 상대방 남자의 궁합을 하락이수로 맞추어 본 순간 구씨는 멈칫했다.

    두 사람 궁합은 몹시 나빴다. 아니, 엄밀히 말해 여자의 배우자 운이 너무 약했다. 어떤 남자를 만나도 해로하기 힘든 팔자였다. 구씨는 자기 판단이 옳은지, 또 판단이 옳다 해도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갈등했다. 그때 스승(서정기 선생)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있는 그대로, 숨김없이 말하라.’

    구씨는 심호흡을 하고 주역에 나온 괘를 글자 하나 남김없이 또박또박 설명했다. 구씨가 정작 놀란 것은 그 다음이었다. 손님이 깔깔 웃으며 자기 과거를 털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스무 살에 결혼했다가 이혼하고 지금은 혼자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것이 그 여성의 설명이었다.

    1∼2년 사이에 쏟아져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새내기 역술인들이 역술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 것인지, 전망은 아직 불투명하다. ‘돌팔이 역술인’이 넘쳐나면서 역술이 혹세무민하고 있다는 비판이 더욱 거세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역술인 자격증 제도를 도입하자는 움직임은 그런 의미에서 눈길을 끈다(위 상자 기사 참조). 그렇지만 우려와 달리 긍정적인 징후도 보인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역술인들은 대부분 자기가 공부하는 과정임을 겸허하게 인정했고, 자기가 하는 공부에 대해 자부심 또한 감추지 않았다. 구승모씨는 스승이 하락이수로 사주를 처음 풀어 주던 순간 자기 운명을 결정했다고 한다. 주역 괘에 따르면 구씨의 운명은 45세를 기점으로 바뀐다고 나와 있었다. 45세 이후 후천괘를 들으면서 그는 무릎을 쳤다. ‘비록 작록의 영화는 누리지 못했으나 세상과 더불어 조화로우리라(和氣同塵 雖無爵祿之榮).’ 그것은 육사를 졸업(28기)하고도 불의의 사고로 군대를 도중 하차해야 했던 자기 운명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 날 이후 구씨는 하락이수를 공부하고, 이를 ‘제도권 학문’으로 체계화하는 데 온 생애를 바치기로 결심했다.

    직업에 대한 자부심도 상당하다. 예지수씨는 현실이 각박해지면서 생활 설계사·정신 치료사로서 역술인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요즘 들어 ‘심심해서 사주나 한번 볼까 하고 들렀다’는 고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경제난 이후 역술 시장에도 거품이 빠지고 있다는 것이다. 대신 고객들은 실직이나 부도, 직장에 대한 불안감, 실직 이후 가정 파탄처럼 지극히 현실적 문제로 역술인을 찾는다.

    미신을 부추기는 행위를 배격하는 것도 이들 새내기 역술인들의 공통점이다. 남궁석씨는 고객들에게 ‘운명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처음부터 못을 박는다. 부적이나 주술로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뜻이다. 대신 그는 고객에게 ‘길한 것은 취하고 흉한 것은 피해가는(聚吉避凶)’ 지혜를 가르쳐 주려 노력한다. 최근 들어 생계가 어려워진 일부 역술인·무속인이 부적이나 굿을 무차별 남용하며 ‘사기를 치는’ 데 대해 그는 매우 비판적이다. “예로부터 무당 자식 잘됐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 못했다”라는 남궁씨는, 정직하게 벌지 않은 돈은 결국 후손에게 나쁜 영향만 미친다고 주장했다.

    예지수씨는 ‘내가 무슨 띠와 궁합이 맞느냐’‘삼재가 들면 좋지 않은 일만 생긴다는 말이 사실이냐’ 같은 고객들의 질문에는 아예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잘못된 역학 상식인 줄 알면서 ‘고객 비위를 맞추느라’ 침묵해 온 역술인들이 역술을 미신 대열로 끌어내리는 데 한몫을 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역술은 한국 사회에서 하위 문화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역술인을 대놓고 천시하는 뒤켠에서 철학관·점집을 찾아다니느라 연간 1조2천억원 이상 쓰는 것이 우리 현실이라면, 의식 있는 새내기 역술인들의 출현은 ‘역술 시장 구조 조정’의 신호탄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 역술·무속인 30만명, 한 해 1조2천억 벌어

    물론 이들 수강생이 처음부터 역술인을 지망하는 것은 아니다. <월간 역학> 발행인 전용원씨는, 능력이나 성실함만으로 성공이 주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나이 들어 깨닫게 되면서 사람들이 ‘운명’에 눈을 돌리게 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격변하는 이즈음의 한국 사회가 이같은 회의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역학 강의를 듣는 수강생 상당수도 이런 동기에서 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말을 타면 견마 잡히고 싶어지는 법인가. “벌써부터 주변 사람들 사주를 봐 주고 푼돈 버는 데 재미를 붙인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수강을 마치면 철학관을 차리겠다고 벼른다”라고 수강생 김행기씨(62)는 말한다. 처음부터 창업을 목적으로 수강을 신청하는 사람도 점차 늘어, 전체 수강생의 10% 가량을 차지한다는 것이 정헌주씨의 분석이다.

    일반인이 역술을 창업 수단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극히 최근에 생긴 현상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역술인은 ‘팔자 센 사람’ 또는 ‘주역쟁이’ 들이나 선택하는 직업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요즘 발행되는 생활 정보지에는 ‘역학 단기 속성반 모집’ ‘3개월 연수 뒤 창업 보장’ ‘○○도사 개인 지도’처럼 일반인을 상대로 한 광고가 눈길을 끈다. 아예 ‘현 경제 위기에서 실직한 계층의 재취업 기회가 될 수 있음’이라고 노골적으로 광고하는 곳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한국역술인협회·대한승공경신회 등 관련 단체가 주장하는 대로라면 현재 전국에서 활동하는 역술인·무속인은 대략 30만명. 이들이 97년에 벌어들인 돈은 1조2천억원을 웃도는 것으로 추정된다. 경제난이 본격화하면서 철학관·점집 중 30%가 문을 닫았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그럼에도 철학관은 여전히 소자본 창업이 가능하며, ‘개인 능력에 따라’ 목돈을 벌 수 있는 유망 업종이라는 것이 창업을 부추기는 일부 학원과 역술인의 선전이다.

    이에 대해 역술계 내부에서는 이견이 분분하다. 역술인 정진호씨(53)는 “20년간 명리학을 공부한 다음에야 간신히 주역에 눈을 뜬 듯한 느낌을 받았다. 30년이 넘으니 도리어 남의 운명을 언급하는 것이 두려워졌다”라며, 짧은 공부로 역술인이 되는 것을 경계했다. 만석 서정기 선생 또한 오행학을 극치까지 터득하려면 평생을 바치며 자중지세를 지켜야 하는데, 주역의 근본 원리를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이를 잡술로 이용하려는 행태는 ‘물병에 물이 절반도 차 있지 않으면서 출렁거리는 격’이라고 경고했다.

  • 3개월 속성반 이수 후 창업은 문제

    3·6개월 속성반 따위는 아예 언급할 가치조차 없지만 문화센터를 통한 창업 또한 문제가 있다고 기성 역술인들은 주장한다. 문화센터에서 초급·중급·상급까지 역학 강좌를 마치는 데 걸리는 기간은 보통 2년. 개중에는 조기 창업을 목표로 역학·관상학·성명학 등 대여섯 과목을 동시에 수강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 문화센터 예찬론을 펴는 역술인도 있다. 1년 전 문화센터를 졸업한 뒤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철학관을 낸 남궁석씨(40·수봉철학관)가 대표적이다. 신체가 자유롭지 못한 남궁씨는 어려서부터 ‘운명은 100% 있다’는 확신을 갖고 살았다. 그가 운명 공부에 직접 뛰어든 것은 5년 전. 당시 그는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름난 역술인라면 시간·장소를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그렇지만 ‘살’을 중심으로 사주를 설명하는 그들의 방식이 남궁씨는 영 마뜩치 않았다.

    남궁씨는 결국 참된 스승을 한 신문사가 운영하는 문화센터에서 찾았다. 역술을 생업으로 삼을 결심도 그 스승을 만난 뒤 비로소 싹튼 것이다. “역술인 문하에서 30년을 공부하느냐, 문화센터에서 단기간 수학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스승을 만나고, 그 가르침에 따라 노력하는 것이다”라고 남궁씨는 잘라 말한다. 문화센터에서 공부하는 3년 동안 그는 서너 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다. 공부가 무르익을 무렵 연습 삼아 사주를 보아 준 주변 사람만 수백 명. 현재 남궁씨 단골 고객 가운데 30∼40%는 당시 인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문화센터를 통해서건 전문 학원을 통해서건 역술 창업을 꿈꾸는 사람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문제는 ‘창업’이 아닌 ‘창업 그후’라는 사실이다.
  • 최근 경기도 일산 자택에 철학관을 차린 ㄱ씨(40). 4년 가까이 기문둔갑(奇門遁甲)을 공부한 그는 스승으로부터 실력을 인정받은 수제자이다. 제갈공명이 능통했던 것으로 유명한 기문둔갑은 구궁(九宮)으로 길흉을 판단하는 일종의 복술(卜術). 그러나 첫 손님을 받은 뒤 ㄱ씨는 자신감을 잃었다. 운세 설명을 듣고 난 손님이 ‘별 것 아니네’라며,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달랑 던지고 갔기 때문이다.

    4년 전부터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기문가 성야’라는 기문둔갑 전문 철학관을 운영하는 예지수씨(41)는, 상담 기술이 부족해 그같은 문제가 빚어지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역술인들 세계에서는 ‘기 싸움에서 밀리면 안된다’는 말이 철칙처럼 통한다. 그러나 첫 대면에서 정확한 사주·점괘 풀이로 상대방 기를 꺾어 놓되, 진정한 역술인이라면 인품과 정성으로 상대방을 감화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예씨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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