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축 거절한 94세 6·25 참전 노병 “한국 방어는 내 소명이었다”
[김진명의 워싱턴 리얼타임]
입력 2021.05.23 18:05 | 수정 2021.05.23 18:05
21일(현지 시각) 백악관에서 열린 명예 훈장 수여식에서 94세의 랠프 퍼킷 주니어(왼쪽) 미 예비역 대령이 허리를 곧게 편 채 조 바이든(가운데) 대통령 곁에 서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휠체어를 타던 94세의 노병(老兵)은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미군 최고등급의 훈장을 주려고 다가오는 것을 보자마자
온 힘을 다해 스스로 일어섰다.
젊은 장교가 가져다 준 보행보조기를 곁으로 치워 버리고, 부축해 주려는 손길도 뿌리쳤다.
71년 전 미 육군 레인저(특수부대) 중위였던 남자의 자존심은
‘국가의 명예’가 걸린 자리에서 꼿꼿이 서있지 못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21일(현지 시각) 오후 한·미 정상이 나란히 참석한 가운데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명예 훈장(medal of honor)’ 수여식이 열렸다. 모두발언이 끝나고, 바이든 대통령이 “서훈 사유를 듣고 훈장을 수여하겠다”며 6·25 참전용사인 랠프 퍼킷 주니어(94) 예비역 육군 대령 쪽으로 다가갔다. 고령으로 쇠약해진 퍼킷 대령은 휠체어를 타고 입장해 의자에 앉아 있었다.
21일(현지 시각)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열린 미군 최고등급 훈장 '명예훈장' 수여식에서 랠프 퍼킷 주니어 예비역 대령이 서훈사유가 낭독되는 동안 보행보조기를 옆으로 치우고 부축해 주려는 손길도 뿌리치며 꼿꼿이 서있다.
그런데 훈장을 든 장교와 함께 바이든 대통령이 다가오는 것을 본 순간, 퍼킷 대령이 의자 팔걸이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가까스로 두어 걸음을 딛어 바이든 대통령 곁에 섰다. 진행을 돕던 백악관 소속의 여성 장교가 보행 보조기를 급히 가져다 놓았다. 하지만 퍼킷 대령은 보조기를 옆으로 밀쳐 버렸다. 삭정이처럼 마른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고 최대한 허리를 곧게 폈다.
서훈사유가 낭독되는 동안 퍼킷 대령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1분여 뒤 여성 장교가 다가가 손을 잡으며 부축해 주겠다고 속삭였다. 그러나 퍼킷 대령은 부드럽게 웃어 보이며 손을 뿌리쳤다. 시간이 흐를 수록 퍼킷 대령의 몸은 더 심하게 앞뒤로 흔들리는 것을 눈치 챈 바이든 대통령이 자연스럽게 왼팔을 잡으며 말을 건넬 때까지 2분 50초간 그는 홀로 서있었다. 마침내 바이든 대통령이 그의 목에 ‘명예 훈장’을 거는 순간, 우레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미군 최고등급 훈장인 '명예 훈장'을 받기 위해 랠프 퍼킷 주니어(왼쪽) 대령이 휠체어를 탄 채 백악관 이스트룸에 들어서고 있다. 오른쪽에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보인다. /로이터 연합뉴스
퍼킷 대령은 6·25 전쟁 중 청천강 일대 205고지에서 51명의 부대원과 9명의 한국군(카투사)을 지휘해 중공군 수백 명을 물리친 공로로 이날 미군 최고등급 훈장인 명예 훈장을 받았다. 23세의 젊은 중위였던 그는 10배 이상 많은 중공군의 기습 앞에서 부하들이 적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세 번이나 참호에서 뛰어 나갔다가 큰 부상을 입었다. 부하들에게 “나를 버리고 가라”고 명령했지만, 지휘관의 용기에 감동받은 이등병 두 명이 불복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퍼킷 대령은 수여식 후 본지 인터뷰에서 “(바이든·문재인) 두 대통령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똑바로 서있고 싶었다”고 했다. 청력이 약해진 그를 대신해 말을 전한 아내 진 퍼킷(88) 여사는 “그러지 말라고 말했는데도… 이 사람 성격이 그렇다”고 했다.
베트남전에도 참전했던 퍼킷 대령은 수훈십자상, 은성·동성훈장 등 수많은 훈장을 받았지만 평소 자신의 공적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는다고 한다. 백악관에서 명예 훈장을 받으러 오라고 전화했을 때도 “왜 야단들이오? 그냥 우편으로 보내줄 수 없습니까”라고 반응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우편으로 보내는 대신 제가 드리겠다”며 “(자랑스러운) 군 복무에 대해 약간의 야단법석을 일으켜가며 받으실 자격이 된다”고 했다.
진 여사는 퍼킷 대령이 “미국이 도왔던 모든 나라 중에 한국이 가장 감사를 표할 줄 안다. 기회만 되면 고맙다고 말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고 했다. “포화가 쏟아지는 전장이 두렵지 않았냐”는 질문에 퍼킷 대령은 진 여사를 통해 “한국에 가고 싶었다. 한국을 방어하는 것이 정말 내 소명이라고 느꼈다”고 했다. “한국을 도와 성공시키는 것이 내 임무”였고 “긴 세월에 걸쳐 결국 그렇게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퍼킷 대령의 서훈은 4월 말에 결정됐지만, 한·미 정상회담 계기로 수여식이 열릴 것이란 사실은 그보다 늦게 통보됐다고 한다. 진 여사는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아들·딸 내외와 6명의 손주가 급히 백악관 여행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다”고 말했다. 앤서니 김 헤리티지재단 리서치매니저는 “문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며 “상징적이고 강력한 수여식은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의 안보에 대한 미국의 오랜 헌신을 보여줄 방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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