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이한빛, 박환성, 이재학..왜 죽음은 반복되나
노도현 기자 입력 2020.02.29. 12:58
2017년 5월 1일 청년유니온 회원들이 서울 혜화역 앞에서 tvN <혼술남녀> 조연출 고 이한빛 PD를 추모하는 플래시몹을 벌이고 있다. / 이준헌 기자
2016년 10월 tvN 드라마 조연출 이한빛 PD가 세상을 떠났다.
“우리가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이미 지쳐 있는 노동자들을 독촉하고 등 떠밀고,
제가 가장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긴 어려웠어요.”
그는 유서에서 방송계의 열악한 노동환경을 고발했다. 정규직인 자신 역시 촬영 기간 55일 중 딱 이틀 쉬었다. 해고된 비정규직 스태프들에게 계약금을 돌려받는 일은 그의 몫이었다.
9개월 뒤, 두 명의 PD가 아프리카로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했다. 오랫동안 자연다큐멘터리를 찍어온 독립PD인 김광일·박환성 PD였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직접 밤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운전기사를 고용하지 못할 만큼 제작비가 빠듯했다. 박환성 PD는 출국 전 EBS가 정부 제작지원금의 40%를 ‘간접비’ 명목으로 내놓고, 저작권까지 양도할 것을 요구했다고 폭로했다. 박 PD는 생전 인터뷰에서 불리한 계약을 맺는 이유에 대해 “이 업계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게 계약을 한다”고 말했다.
다르지만 닮은 사건들
지난 2월 4일 CJB 청주방송에서 일하던 이재학 PD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프리랜서였던 그는 자신과 동료들의 처우 개선을 요구했다가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당했다.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냈지만 1심에서 패소했다. 그는 “억울해 미치겠다”는 유서를 남겼다. 세 사건은 방송계 비정규직의 취약한 노동환경에서 비롯됐다.
“고 이한빛 PD가 스태프들에게 갑질을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방송제작 현장을 비관하며 목숨을 끊었을 때, 고 박환성 PD가 방송사의 제작비·저작권 갑질에 맞서기로 마음먹자마자 열악한 제작환경에서 고군분투하다가 우리 곁을 떠났을 때, 다시는 이런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고인들께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사람의 무거운 마음으로, 고 이재학 PD의 유족들과 동료들에게 청주방송과 정부가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똑똑히 지켜보면서 함께하겠습니다.” 지난 2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고 이재학 PD 유족의 입장발표 기자회견에서 정의당 추혜선 의원이 말했다.
한국독립PD협회는 성명을 내고 “고인(이재학 PD)이 남긴 이 쓸쓸한 절규는 무척이나 친숙하다. 삼 년 전의 박환성이, 김광일이 그랬다. 지금 이 시간에도 비정규직으로, 독립PD로 살아가는 우리의 심정이 그렇다”며 “방송산업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선해내지 않는다면 제2의 이재학·박환성·김광일을 막아내지 못할 것은 자명한 일”이라고 했다.
방송계 비정규직 문제는 해결책을 찾기 쉽지 않다. 비정규직 문제에 창의성·자율성을 갖는 방송산업의 특수성까지 더해진 탓이다. 모두를 정규직화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다만 열악한 임금과 근로조건을 정규직과 비슷한 수준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결국은 ‘돈’ 문제다. 13년간 독립PD로 활동한 김기영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 독립PD분과장은 “일한 만큼의 대가를 인정받지 못하는 게 문제”라며 “명확한 근거 없이 제작비를 책정하다보니 낮은 비용으로 사람을 굴리는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방송사들은 경영이 어려워지면 제작비부터 깎는다. 이때 가장 먼저 손을 대는 부분이 인건비다. 피해는 고스란히 비정규직 스태프들에게 돌아간다. 김 PD는 “구두계약 관행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지난해 11월부터 ‘방송프로그램 외주제작 거래 가이드라인’을 시행했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방송사는 ‘표준제작비 산정기준’을 마련하고, 이를 토대로 외주사에 합리적인 제작비를 줘야 한다. 방통위는 재허가·재승인 과정에 가이드라인 준수 여부를 반영할 계획이다. 다만 전전년도 방송사업 매출액이 800억원 이상이면서 외주제작비 지출액이 50억원 이상인 방송사에만 적용된다.
높은 기관이 움직여야 바뀐다
PD들의 죽음은 결코 이례적이거나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방송현장 노동자들이 늘 겪은 문제와 맞닿아 있지만, 방송사 안팎에서 관심을 두지 않았을 뿐이다. 방송사들은 사건이 있을 때마다 ‘바꿔가겠다’는 선언을 뛰어넘는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문제제기는 됐지만 그걸 풀어나가려는 진지한 노력은 없었다”며 “사측이 비정규직 보호에 실패했을 때 책임지게 하는 일관된 제도가 없었던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전 교수는 “지상파를 비롯한 독점적 기업 조직에서 노사는 분리된 듯하지만 ‘내부자’로서 함께 간다. 프리랜서 같은 일종의 외부자들은 내부에 들어가서 고통을 겪고 죽어나가지만 조직에서 나오는 건 유감이나 애도뿐”이라고 말했다.
방송제작 환경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관리·감독 권한을 가진 상층 기구가 움직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유가족이 울부짖고, 대책위가 꾸려져도 문제해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한상혁 방송통신위원장은 2월 14일 고 이재학 PD 유족을 만나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이 잘 진행되는지 지켜보고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한 위원장은 전날 대전·충청지역 지상파방송 대표자들과의 정책간담회 자리에서 청주방송 대표를 따로 불러 대응책을 마련할 것을 주문했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도 2월 19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청주방송에 대해 근로감독 가능 여부를 검토하겠다”며 “막내 작가·교양예능 스태프도 근로조건 자율개선사업 결과가 미흡할 경우 근로감독을 추가로 실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전 교수는 “방통위는 방송사 재허가·재승인을 심사할 때 제작노동자 인권과 노동권을 얼마만큼 책임지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정확히 평가해야 한다”며 “특히 이런 사건이 있을 때는 더욱 엄정하게 사실을 확인하고 책임을 물어가려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영 PD는 “방송계 문제가 해결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가 문화체육관광부·고용노동부·미래창조과학부 등 너무 많은 부처가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서로 공 돌리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며 “부처 간의 통합된 컨트롤타워, 방송계에 특화된 특별 근로감독관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도현 기자 hyun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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