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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이야기

5·18 진실을 알리던 경북대생의 ‘쓸쓸한 죽음

일산백송 2018. 5. 18. 08:45

한겨레신문

5·18 진실을 알리던 경북대생의 ‘쓸쓸한 죽음

김일우 기자

등록 2018-05-17 19:09

수정 2018-05-17 22:50

 

5·18 유공자 권순형씨 고된 삶

80년 진상 알리다 고문 시달려

정신질환에 결혼도 직장도 막혀

형 “수십년 대구서 숨죽여 살았다”

 

광주밖에도 광주로 인한 죽음들은 많았다.

대구서 5·18의 진실을 알리다 끌려간 권순형씨는 고문후유증으로 한평생 정신질환을 앓다가 얼마전 홀로 쓸쓸히 세상을 떴다. 사진은 광주에 있는 한 5·18 희생자의 묘지 <한겨레> 자료사진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을 때 권순형(58)씨는 경북대 역사교육과 80학번 대학 신입생이었다.

그는 대구에서 선배들과 함께 5·18의 진실을 알리는 유인물을 만들고 뿌렸다. 그러다가 경찰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일으켰다.

그는 지난 3월 10만원짜리 월세방에서 혼자 숨진 채 발견됐다.

 

3월17일 권씨가 숨진 것을 발견한 사람은 집주인이었다.

장례는 조용히 치러졌다.

권씨의 형(61)이 동생의 죽음을 국가보훈처에 알렸다.

2002년 5·18 유공자(정신지체 2급 부상자)로 인정된 권씨의 쓸쓸한 죽음은 그렇게 알려졌다.

권씨는 1980년 7월엔 전두환 정권 퇴진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다 대학에서 무기정학을 당했다.

그해 11월엔 대공분실에 끌려갔고, 1981년 4월 군에 강제징집됐다. 군에서도 보안대에 끌려다니며 상습 폭행을 당했다. 계속된 고문과 폭행으로 정신이상 증세가 악화되자 1983년 6월 결국 의병 제대했다. 어머니는 권씨를 병원에 데려가고 무당을 불러 굿도 했지만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아들이 낫기를 그렇게 바랐던 어머니는 2014년 7월 세상을 떠났다.

권씨는 1984년 3월 대학에 복학했지만 정신이상 증세로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다가 1992년 3월 제적됐다.

 

권씨는 대구 동구 낡은 주택에 혼자 세들어 살았다.

결혼과 직장 생활을 하지 못했다.

돈이 필요하면 가끔 인력시장에 나가 돈을 벌었다.

이웃들은 권씨를 “말이 없고 여름에도 방문을 닫고 틀어박혀 있던 착해 보이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권씨는 이웃과 교류하지 않았다. 권씨의 형이 가끔 찾아왔지만 “만나기 싫다”며 방문을 열어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권씨는 혼자 방에 틀어박혀 시를 썼다고 한다.

광주로 인한 상처를 안고 대구에서 살아가는 삶은 외로웠다.

 

“동생이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이후 사복 경찰관들이 우리 가족을 감시했다. 수십 년을 대구에서 숨죽여 살았다.

그동안 가족들이 너무 힘들게 살았다.

5·18 이야기도 꺼내기 싫다.”

권씨의 형은 17일 <한겨레>와의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대구) 시내 일원에 광주학살 관련 유인물 살포. 이윤기, 이상술, 권순형 등이 고문수사를 받음.’ 그의 뜨거웠지만 고통스러웠던 삶은 2006년 경북대 인문과학연구소가 펴낸 <대구지역 학생운동의 발생과 전개>란 책 속의 한 줄로 남았다.

 

김일우 기자 cool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