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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같은 며느리? 그런 건 없어요

일산백송 2017. 9. 30. 21:34

경향신문

[커버스토리 - 시월드의 불편한 추석]딸 같은 며느리? 그런 건 없어요

박송이 기자 입력 2017.09.30. 10:00 수정 2017.09.30. 10:22

 

최장 열흘간의 추석 황금연휴가 시작됐다. 며느리들은 긴 연휴가 반갑지만은 않다. 이미 며느리들의 귓가에는 ‘연휴도 긴데 좀 더 쉬었다 가라’는 시어머니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2박, 3박… 오래 머무를 자신이 없다. 시어머니의 말처럼 며느리가 시집에서 마음 편히 휴식을 취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며느리는 가족 서열의 맨 끄트머리에 있다.

 

아들인 남편이 소파에 누워 TV를 보는 동안, 며느리인 아내는 부엌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기울어진 풍경은 올해도 여전하다. 모두가 함께 즐긴다는 추석밥상에는 밥상을 차리는 사람과 밥상을 받는 사람이 명확하게 구분된다. ‘딸 같은 며느리’라며 친밀감을 내세워도 며느리는 결코 딸과 함께 자리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은 아니다.

 

물론 남편들도 마냥 명절을 즐기는 것은 아니다. 명절마다 ‘명절증후군’을 호소하는 아내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최근 들어 명절이 편하지 않다며 괴로움을 토로하는 남편들이 늘었다. 일을 도우러 부엌에 들어가면 어머니가 만류하고 혼자 편히 있자니 아내의 눈치가 보인다. 명절 후 고스란히 자신에게 쏟아질 아내의 불만도 두렵다.

 

시어머니들도 며느리가 부엌에 있는 게 마음이 편하지 않다고 하소연한다. 30여년 전 자신이 치렀던 명절에 비하면 많이 생략되고 간소화돼 내심 ‘이 정도는 해야지’라고 생각하지만 며느리에게 일을 시키는 게 점점 눈치가 보인다. 아들과 며느리가 조금 더 있다 갔으면 하지만, 그 말도 쉽게 꺼내기 어렵다. 이쯤 되면 며느리도 남편도 시어머니도 모두가 불편한 명절을 보내는 피해자가 아닐까.

 

그러나 위근우 칼럼니스트는 “멀리서 보면 모두가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결론은 안일하다”며 ‘모두가 피해자’라는 결론을 일축한다. 그는 “모두가 공범이 되는 이 구조적 폭력 안에서 당연히 폭력의 피해자는 존재한다”고 말한다.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는 물론 며느리다. 피해자가 명확하다면 문제를 해결할 책임은 피해자가 아닌 다른 쪽에 있다.

 

경향신문은 추석을 앞두고 가부장제 안에서 상처받는 며느리들과 이들을 바라보는 시어머니, 남편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덜 불평등한 명절을 보내기 위해 ‘최소한 하지 말아야 할 말’들도 정리해봤다. 전문가들은 ‘불평등한 관계’를 평등하게 바꾸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남성 중심의 가족공동체 구성원들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다원 시월드 리더십아카데미 원장은 “며느리들이 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불편한 명절’을 바꾸기 위해서는 남편과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집 구성원들이 며느리를 바라보는 관점을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시어머니·며느리는 같은 ‘여성’…연대감은 가지고, 과도한 욕심·희생은 버려야

 

>>고부관계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지난해 추석, 한 마을 입구에 “에미야 어서 와라, 설거지는 시아버지가 다 해주마”라고 쓰인 현수막이 화제를 모았다. 며느리를 ‘도우려는’ 시아버지의 태도에 찬사가 잇따랐다. 그러나 이 말에는 여전히 ‘명절 노동은 며느리의 몫’이라는 전제가 숨어 있다. 며느리들 사이에서는 명절이 며느리의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한다는 불평등한 맥락에는 변함이 없는데, 시아버지가 불쑥 설거지를 해주는 상황이 오히려 편치 않다는 지적이 나왔다.

 

올 추석을 앞두고 여성들이 많이 사용하는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불평등한 명절에 대한 부당함을 토로하는 글들이 쏟아졌다. ‘명절에 왜 여자집보다 남자집을 먼저 가야 하냐’는 근본적인 문제제기부터 ‘며느리만 일하는 상황’에 대해 비판하는 며느리들의 목소리가 들끓었다.

 

20~30대 젊은 며느리들의 상당수는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며느리의 역할에 더 이상 동의하지 않고 거부감을 드러낸다. 남성중심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차별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담은 소설 <82년생 김지영>과 웹툰 <며느라기>의 인기는 이를 반증한다. 인기리에 방영된 KBS 드라마 <아버지가 이상해>에서 새로운 며느리상을 보여줬던 변혜영(이유리)에 대한 폭발적 반응도 마찬가지다. 극 중 변혜영은 차정환(류수영)과 결혼을 약속하며 몇 가지 합의를 한다. 변혜영은 설, 추석, 부모님 생신 챙기기, 한 달에 한 번 양가 부모님 방문 등 구체적 조건을 통해 ‘일방적인 며느리 노릇’이 아니라 ‘평등한 자식 노릇’에 대한 합의점을 찾아간다.

 

■ 며느리는 딸이 아니다

 

20~30대 며느리들은 극 중 ‘변혜영’처럼 며느리의 역할을 평등한 부부관계에서 찾는다. 일각에서는 가부장제가 부여한 며느리 역할의 대안으로 ‘딸 같은 며느리’를 내세우기도 하지만, 전문가들은 ‘며느리는 딸이 될 수 없다’고 일축한다.

 

정다원 시월드아카데미 원장은 고부관계를 상담하러 오시는 시어머니들이 ‘나는 며느리를 딸처럼 생각했는데’라고 말씀하실 때마다 “어머님, 어머님 마음이 그렇게 넓지 않아요. 며느리는 딸처럼 여기실 수 없어요’라고 답해준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인식 차이 때문에 시집살이 시키는 시어머니는 없는데 시집살이 당하는 며느리는 많고, 시어머니는 상처준 적이 없는데 상처받은 며느리만 존재하게 된다”면서 “시어머니라면 며느리에 대한 예의를 지켜주는 게 먼저”라고 말했다.

 

김숙기 나우미가족문화연구원 원장도 “친정엄마와 딸 같은 관계를 기대하다가 기대에 못 미치면 오히려 더 감정이 상해 억울한 생각이 들 수가 있다”면서 “장모에게 사위가 ‘내 딸에게 잘해줬으면 하는 남자’인 것처럼 시어머니에게 며느리도 ‘아들에게 잘해줬으면 하는 여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 원장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가 ‘여성’이라는 연대감을 갖고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관계로 재설정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요구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참고 견디는 것은 ‘이쁨받고 싶은 보상심리’ 때문이지만, 그런 관계는 부부끼리면 족하다”면서 “‘시어머니는 내 남편을 낳아주고 길러줘서 고마운 분’이라고만 생각하면 된다. 시어머니의 말을 너무 과잉 해석하지도 말고, 반대로 그 말에 부응하기 위해 과잉 희생할 필요도 없다”고 조언했다. 또 “시어머니는 지금 세대의 며느리를 ‘아이를 키우면서 일도 해야 하고 자기계발도 해야 하는 힘든 상황에 놓여 있는, 심리적 지지가 필요한 여성’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 ‘분리’, 새로운 관계맺기의 출발

 

전문가들은 20~30대 며느리가 부부관계를 기준에 놓고 며느리의 의미를 찾듯, 시어머니도 자신의 가정과 아들의 가정을 ‘분리’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김숙기 원장은 “시어머니는 자기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 예전처럼 자식이 많지 않고 1~2명이다 보니 최선을 다해 키운 아들의 며느리가 기대에 못 미칠 수도 있겠지만, 시어머니들은 분가한 아들보다 이제는 남편하고의 관계 개선, 관계의 성장에 주력해야 한다”며 “‘내가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라고 말하는 시어머니들 대부분은 남편과 사이가 안 좋다. 자기 자신, 그리고 남편과의 관계에 집중하라”고 말했다.

 

물론 아들 또한 원가정으로부터 분리돼야 한다.

 

김 원장은 “결혼을 한 남편은 부모님의 아들이기 전에 한 여자의 남편이라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부모님과 정서적으로 분리돼야 한다”고 말했다. 분리가 전제될 때 비로소 발전적인 관계를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다원 원장은 “시어머니에게 ‘어머니가 틀렸어요’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에요’라고 말해도 시어머니들은 쉽게 바뀌기 어려울 수 있다”면서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제까지 계속 대물림돼 온 시집살이 문화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말은 그만! 상처 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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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가족들이 모인 명절이지만, 무심코 주고받은 말이 상처가 되는 경우도 있다. 상처는 두고두고 관계를 어긋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좀 더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가기 위해 전문가들에게 이번 추석에 ‘이것만은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들어봤다. 전문가들은 일방적으로 며느리가 상처받는 일이 많은 명절에 며느리도 서운한 감정을 눌러 참기보다는 표현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시부모 - 며느리를 낮추고 아들을 높이는 말 “네가 복이 있으려니까 우리 아들 같은 잘난 남자를 만났다.” - 며느리에게 명절 노동 전가하는 말 “며늘아기가 할 건데 네(아들)가 뭘 할 줄 안다고 부엌에서 전을 부치고 앉아 있어.” - 시어머니의 방식을 강요하는 말 “내가 어떻게 키운 아들인데 밥을 안하니, 나는 얘 아침밥 한번 안 굶기고 키웠다.” - 며느리를 인정하지 않는 말 “넌 왜 음식을 이렇게밖에 못하니.” - 친정 가는 며느리를 막아서는 말 “곧 있으면 시누이 오는데 좀 더 있다 보고 가야지.” 남편 - 자신이 하지 않은 효도를 아내에게 떠넘기는 말 “당신이 우리 엄마한테 딸처럼 싹싹하고 애교 있는 며느리였으면 좋겠어.” 며느리 - 시어머니를 존중하지 않는 말 “어머니, 그런 건 말 안 해주셔도 요즘 인터넷 보면 다 나와 있어요.”

<박송이 기자 ps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