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인간시장' 김홍신 "국회의원 연봉, 공무원 과장급 정도면 충분"
"의원들, 높은 연봉과 각종특권 누리는 것은 나쁜짓"
"특권 폐지 포함 정치개혁위 만들되 정당 사람 배제"
[※ 편집자= 김홍신 작가의 인터뷰 기사는 세 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이번 기사가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 기사는 방송활동, 정치활동 등과 관련된 것으로 다음 주 후반, 세 번째 기사는 문학 활동과 관련된 것으로 그다음 주 후반쯤 송고할 예정입니다. 자서전적 인터뷰이다 보니 매우 길고 성장 스토리, 개인 경험 등이 많이 들어갑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김홍신 [촬영 이은도]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지금도 국회의원 모두가 배지를 달고 다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그건 분명히 바보짓입니다. 국회의원은 그 활동을 제대로 해야 국회의원이지 배지를 달고 다닌다고 해서 국회의원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 특권도 모두 없애야 합니다, 세비는 공무원 과장급 이하 수준으로 낮춰야 하고 비행기 비즈니스석, KTX 특실, 의원회관 내 병원 무료 이용 등도 말이 안 됩니다. 그런 행위는 나쁜 짓입니다. 그게 다 국민의 세금이기 때문입니다."
작가 김홍신(77)은 지난 6월 14일과 24일 두차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국회의원은 생계 수단이 아니라 봉사하는 자리"라면서 "국회의원은 권위와 명예로 충분히 보상받기에 국민 세금으로 특권을 누리는 것은 말이 안 되는 행위"라고 했다.
김 작가는 "국민이 국회의원 특권을 빼앗아 와야 한다"면서 "국회의원의 급여를 낮추고 특권을 없애면 각 분야에서 놀라운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국회에 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그는 "이를 위해서는 위원회를 만들어 세비, 국회의원 수, 선거구제 문제 등 정치개혁과 관련한 일을 논의해야 한다"면서 "이 위원회에는 정당이 사람을 파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1985년 당시 김홍신의 밀리언셀러 '인간시장'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1947년 충남 논산에서 성장한 김홍신은 건국대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76년 월간 '현대문학'에 '물살', '본전댁'으로 등단했다. 1981년에는 소설 '인간시장'으로 유명 인사가 됐다. 이 소설은 대한민국 최초로 판매량 100만부를 돌파한 기록을 갖고 있으며, 지금까지 최종 판매량은 560만부에 달한다.
그는 1981년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KBS, MBC 등에서 방송 활동을 하면서 특유의 말솜씨와 유머 감각으로 인기를 끌었다. 1991년부터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을 하다 1996년 통합민주당을 통해 15대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됐다. 4년 후인 2000년에는 한나라당 소속으로 비례대표 의원을 했다.
그는 8년간 매년 의정활동 1위 평가를 받았다. 특히 거의 30년 전부터 선구적으로 국회의원 특권 폐지에 나섰고 기초생활보장법, 장애인복지법, 의약분업 등을 주도했다.
정계를 은퇴한 후 2007년에는 10부작 소설 '대발해'를 발표했다. 그는 집필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까지 모두 138권의 책을 내놨고 조만간 139번째 책을 출간한다. 국내외에 다니며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에 대해 강의도 하고 있다.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한 어린 시절 김홍신 [본인 제공]
-- 고향은 어디인가.
▲ 태어난 곳은 충남 공주다. 옛날에는 산파(産婆)도 별로 없어서 어머니들이 아기를 낳을 때 친정이나 시집에 갔다. 우리 어머니는 친정이 충북 영동이어서 먼 곳이었다. 그래서 인근의 공주에 있는 시댁에 가서 나를 낳으셨다. 어머니는 출산한 지 3∼4주 후에 나를 안고 다시 논산 집으로 돌아오셨다. 그 이후 나는 논산에서 성장했으니 나의 고향은 논산이다. 내 아래로는 여동생 3명이 있다. 위로는 6명의 누나와 형들이 있었으나 아주 어린 시절에 숨졌다고 한다.
-- 아버지는 대목수였다고 하던데.
▲ 집을 지으려면 목수, 미장이, 기와 얹는 사람 등을 동원해야 하는데, 이를 총괄하는 사람을 대목수라고 한다. 지금으로 말하면 건축업자다. 아버지는 대목수로서 자기 몫을 잘 챙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량식을 하면 광목도 걸고, 쌀도 걸고 하는데, 모든 것을 다른 사람한테 나눠주고 빈손으로 오시곤 했다고 한다. 집을 지을 때 주인이 여러 가지 요구를 해서 건축비가 예상보다 많이 들어가면 그 돈을 주인한테 받아내야 하는데, 아버지는 그걸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인심을 얻고, 법 없이 살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어머니는 "도대체 네 아버지를 믿고 살기 어렵다"고 원망하셨다.
유치원 졸업식 때 김홍신(뒷줄 가운데 남자아이, 맨 왼쪽은 프랑스 신부님) [본인 제공]-- 어머니는 엄격하신 분이었다고 하던데.
▲ 어머니는 왕 계주였다. 여러 개의 계를 맡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내 기억으로는 어머니가 관리하는 계가 많을 때는 10개나 됐다. 신용이 뛰어나고, 부지런하고, 관리능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시골에서 계는 목돈이나 농사자금을 마련하는 금융기관이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는 너무 엄격해서 나는 우리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닌 줄 알았다. 걸레를 던져주고는 방을 쓸고 닦으라 했다. 물도 길어와야 했다. 어린아이가 마루에서 밥을 먹다가 땅에 흘리는 것은 당연한데도 흙이 묻은 밥알을 씻어서 입에 넣으라고 하셨다. 한번은 동네의 장애 아이를 친구들과 함께 놀린 적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울고 가는 것을 우리 어머니가 봤다. 어머니는 나를 끌고 그 집으로 가서는 용서를 빌라고 했다. 다른 친구들의 어머니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우리 어머니만 그걸 요구했다.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집에 온 뒤에 회초리를 해오라고 했다. 나는 그걸로 맞을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치마를 종아리 위 까지 걷어 올리시고는 "내가 너를 잘못 가르쳤으니 네가 나를 때려라"라고 했다. 그때 나는 어머니를 붙잡고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었다.
-- 어머니가 강단이 있는 분이었나.
▲ 큰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문중에서는 나를 큰 집의 양자로 보내라고 했다. 아버지는 성격이 착한 분이니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에 답답해하던 어머니는 "나는 죽어도 못 보낸다"면서 버티셨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문중의 미움을 받았던 이유다. 한번은 내가 동네 또래 친구를 때린 적이 있었다. 그 친구가 문중의 항렬로는 나에게 먼 당숙 뻘이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 친구는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는다면서 화를 냈다. 싸움이 일어났고, 그가 나한테 얻어맞았다. 문제는 그 아이의 형이 4명이나 됐는데, 그들이 몰려와 나를 때린 것이었다. 이를 알게 된 어머니는 방석 하나 들고는 나를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끌고 갔다. 내 몸을 플라타너스 나무에 새끼줄로 묶고는 그 앞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농성을 시작했다. 조용하고 심심한 시골에 이보다 재미있는 구경거리는 없었다. 동네 사람들 모두가 몰려나왔다. 어머니는 "내 아들을 죽여라.. 내 앞에서 죽여라"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말리자 "내가 서방질해서라도 아들을 하나 더 나을껴!"라고 했다. 그 순간 나는 아찔했다. 어린 나이이지만 서방질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아이의 부모님 두 분과 그 형들이 모두 찾아와 잘못했다고 빌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했다. 그때서야 나는 나무에서 풀려나올 수 있었다. 그 일은 우리 동네의 대형 사건이었는데. 그 이후에는 동네에서 나를 건드리는 아이들이 없었다.
고교 시절의 김홍신 모습 [본인 제공]
-- 본인은 고교 졸업 후에 국문과가 아닌 의대 지원을 했다고 하던데.
▲ 나는 충남에서 대전고, 공주사대부고에 이어 세 번째 명문이었던 공주고로 진학했다. 유학을 간 것이었다. 그러나 1학년 말에 고향인 논산의 대건고로 돌아와야 했다. 어머니가 관리하는 계가 파산해서 가정 형편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대건고에서는 작문 선생님이 문학을 하라고 권했고, 미술 선생님은 미술을 공부하라고 했다. 그런데도 내가 의대를 지원한 것은 부모님의 바람 때문이었다. 특히 몸이 아프신 어머니가 나의 의대 진학을 강하게 원했다. 나는 가톨릭 의대에 원서를 냈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1년간 재수해서 건대 국문과에 지원했다. 재수 시절에 단편 소설을 7편이나 썼으니 공부를 열심히 한 것은 아니었다. 합격자 발표날에 건대에 가서 벽보를 보니 내 이름이 없었다. 나는 너무 좌절한 나머지 극단적 선택까지 생각했다. 나는 논산 집에 와서는 공책에 유서를 써서 책상 위에 놓고는 아침에 집을 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모님이 나를 찾지 않으셨다. 외아들이 죽겠다고 선언했으니 어머니 성격에 난리가 나서 나를 찾을 법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으셨다. 밤에 집에 돌아와서 보니 부모님은 그 유서를 펼쳐보지도 않았다. 내 방 안을 보기가 싫으니 아예 들어가지 않으신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유서를 쓰고 집에서 나가는 짓을 몇차례나 더 반복했지만, 부모님은 한 번도 그 유서를 보지 못했다.
-- 결국 건대 국문과를 다니지 않았나.
▲ 열흘쯤 지난 시점의 어둑어둑한 겨울 저녁때 우체국 과장님과 직원 2명이 우리 집을 급하게 찾아왔다. 춘부장님이 계시냐고 하고는 아버지한테 가서는 죄송하다면서 노란 봉투를 내밀었다. 그 안에 합격통지서가 들어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체국을 새로 지어서 이전하는데, 우편물이 들어 있는 큰 통 하나가 수채통에 빠졌다고 했다. 그 안에 노란 봉투가 있었는데, 물에 젖는 바람에 봉투에 적힌 주소가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봉투를 열어봤더니 건대 합격 통지서여서 고등학교마다 전화를 걸어 김홍신이라는 학생의 주소를 뒤늦게 확인했다고 했다.
1960년대 건국대 중앙도서관 모습 [건국대 제공]
-- 건대에 가서 바로 등록했나.
▲ 시간이 없었다. 등록 마감일은 그다음 날 오후 5시였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그날 밤에 여러 집을 다니며 돈을 꿨다. 우리 어머니이니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다음 날 아침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와서 건국대 경리과에 등록할 수 있었다.
-- 벽보의 합격자 명단에는 본인의 이름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 추가 합격이었다. 국문과 정원이 20명인데, 나의 점수는 21등이었다고 한다. 합격자 2명이 어떤 사정인지는 몰라도 등록하지 않는 바람에 내가 들어가게 된 것이다.
-- 대학에 들어갔으니 부모님은 좋아하셨을 듯하다.
▲ 그렇지 않다. 부모님은 왜 국문과냐고 물었고, 나는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했다. 당시 부모님은 소설가는 건달이나 가난뱅이 정도로 인식하셨다. 나는 건대에 들어가자마자 스타가 됐다. 건대 학보사의 문학 공모전에서 소설이 당선됐기 때문이다. 4학년 때는 정부가 주최하는 전국 대학 문화예술축전에서 장원을 했다. 대학 졸업 후 1976년에는 '현대문학'을 통한 등단에 이어 1981년에는 소설 '인간시장'으로 유명한 사람이 됐다. 우리 부모님은 그걸 실감하지 못했다. 우리 시골 마을에서는 신문을 보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나를 자랑스럽게 생각한 것은 내가 방송 출연을 할 때부터다.
대학 졸업식에서 김홍신과 어머니 [본인 제공]
-- 소설가로 이름을 떨치게 됐는데, 왜 정치활동을 시작했나.
▲ 나는 유명 인사가 됐고, 1991년부터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5년쯤 지나서 서경석, 최열, 장을병, 홍성우 같은 분들이 언제까지 시민 활동만 할 것이냐면서 정치활동을 하자고 했다. 그래서 개혁신당의 홍보위원장을 맡게 됐고, 그걸 계기로 1996년 통합민주당의 비례대표 의원으로 국회에 들어가게 됐다.
-- 국회의원이 되자마자 언론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고 하던데.
▲ 1996년 5월30일 15대 국회의원이 됐다. 그러니 5월에는 30일과 31일 이틀만 국회의원으로서 일을 한 셈이다. 그런데도 한 달 치 세비가 나왔다. 나는 이게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 세비를 반납했다. 그때 국민의 세금이 엉망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 본인의 건강 보험료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고 하던데.
▲ 당시 나는 소설 '인간시장'으로 벌이(수입)가 괜찮았을 때였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에는 국민건강보험료로 8만여원을 냈었는데, 국회의원이 되니 4만원으로 줄었다. 이것도 말이 안 됐다. 나는 소설책으로 돈 벌고 있는데, 추가로 세비도 받으니 수입이 두배로 늘어났다. 그러면 건강보험료가 늘어나야 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나는 보험료를 16만원으로 올려달라고 장관에게 요구했다.
2003년 2월 국회에서 질의하는 김홍신 의원 [연합뉴스 사진]
-- 8년간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매년 의정 활동 1위를 했는데, 그 비결은 무엇인가.
▲ 국회의원은 세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법안 제출, 행정부 감시, 예산 결산이다. 이 중에 내가 잘했다는 것은 법안 제출과 행정부 감시다. 제출 법안 숫자로는 1등이 아니다. 3등쯤 했을 것이다. 법안 내용으로는 1등 평가를 받았다. 나는 국회 출석률이 1등이었고, 행정부 국정감사에서도 1등을 했다. 나는 비례대표 의원이어서 예산 분야에서 일을 많이 하지는 못했다. 예결위는 대체로 지역구 의원들이 맡는다.
-- 국정감사는 어떻게 했기에 1등 평가를 받았나
▲ 행정부 감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 국정감사다, 당시는 거의 모든 국회의원이 질문을 비밀에 부치는 경우가 많았다. 피감 기관이 답변을 미리 준비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무엇을 따질 것인지 미리 공개했다. 그래야 피감 기관들이 준비를 제대로 하고 다음부터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나는 사안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하고, 증거를 갖고 있기에 피감기관이 국정감사장에서 거짓말을 하면 강도 높게 비판했다. 나는 같은 당 소속 기관장이나 지자체장이라고 해서 봐주는 법이 없었다. 국회의원을 시작했던 해의 연말이 되니 중앙일보가 의정활동 전체 1등은 김홍신이라고 발표했다.
제22대 국회의원 배지 2024년 4월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제22대 국회 개원종합지원실 현판식에서 관계자가 22 대 국회의원들이 착용할 300개의 국회의원 배지를 공개했다 [공동취재]
-- 본인은 국회의원이 배지를 달고 다니는 것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했다고 하는데.
▲ 국회의원이 배지를 달고 다니는 것은 바보짓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국회의원 시절 8년간 한 번도 배지를 달아본 적이 없다. 15대와 16대 두 번 배지를 받았는데, 2개 모두 장애인 돕기 모금 행사에 내놨다. 국회의원 배지는 금덩어리가 아닌 금도금이어서 2만원 정도밖에 안 되는데, 내 배지는 경매를 통해 각각 200만원에 팔렸다. 그 돈은 전액 장애인단체에 기부했다. 그런데 나중에 우리 집 방에서 배지 하나가 더 나왔다. 당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나한테 배지를 달고 다니라고 했지만 그것을 거부한 적이 있다. 내가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믿고 의지했던 제정구 의원이 이 총재한테 대들지 말라는 뜻에서 배지를 사서 준 것인데, 나는 역시 달지 않았다.
-- 2만원짜리 배지를 200만원에 매입한 사람은 누구인가.
▲ 한 분은 아버지가 국회의원 선거에 몇 번 출마했다가 낙선해서 집안이 망했는데, 아버지 산소에 그걸 묻어주기 위해 샀다고 한다.
-- 현재도 대부분의 국회의원이 배지를 달고 다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대부분이 아니라 모든 국회의원이 배지를 달고 다니는 듯하다. 국회의원이라고 과시하는 것인데, 국회의원 역할을 하면 국회의원이고, 국회의원 역할을 하지 않고 딴짓하면 국회의원이 아니다. 그러니 배지를 달고 다닐 필요가 없다.
-- 국회의원 시절 8년간 한 번도 국회의사당 정문을 이용한 적이 없다고 하던데.
▲ 당시는 시민들이 정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옆의 쪽문을 이용해야 했다. 국회의원만 정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국민이 정문을 이용하고, 국회의원이 쪽문을 이용하는 게 맞다고 봤다. 그래서 나는 항상 쪽문을 이용했다.
"국회의원 특권 폐지하라" 2023년 7월17일 제헌절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국회의원 특권폐지를 촉구하는 시민들 [연합뉴스 사진]
-- 국회의원 세비가 연간 1억5천700만원인데, 어떻게 생각하나.
▲ 국회는 국민대표자 회의를 줄인 말이다. 국민 대표자인 국회의원은 생계를 위한 직업이 아니라 봉사직이다. 세비란 말도 국회의원 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보전해준다는 뜻이다. 국회의원은 권위와 명예를 가지면 된다. 그러니 특권은 다 내려놓아야 한다. 세비도 대폭 줄여야 한다. 공직자의 평균 연봉 정도면 된다고 생각한다.
-- 공직자 평균 급여는 중앙부처 과장급 월급을 말하나.
▲ 국회의원 연봉은 중앙부처 과장급 연봉보다 많으면 안 된다. 그 이하가 돼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국회의원의 명예와 권위는 돈으로 치면 몇억원도 넘는다.
-- 국회의원 특권 폐지운동본부를 이끌었던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은 국회의원 월급으로 도시근로자 평균 임금인 월 400만원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는데.
▲ 내 말이 그 이야기다. 나도 400만원 정도면 충분하다고 본다.
--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면책 특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당연히 100% 빨리 없애야 한다. 그런 특권은 왕조 권력 같은 시대에나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언론 활동과 국민 정보가 활성화됐다. 기록의 보전과 정보화도 잘 돼 있다. 불체포 특권을 없애야 국회의원들이 정신을 차린다. 면책 특권도 없애야 한다. 다만 국정감사 때 정부의 비리를 잡아내거나 예산결산 때의 단상 공개 발언 등 일부에 대해서는 예외를 둘 필요가 있다.
비행기 퍼스트클래스의 모습 [인터넷 캡처 사진]
-- 국회의원은 왜 KTX 특실, 비행기 비즈니스석을 공짜로 타고 다니고 공항 귀빈실과 귀빈 주차장은 무료로 이용하는가.
▲ 내가 국회의원을 할 때는 새마을 열차표는 공짜였다. 비행기 일반석은 의원이 돈을 내고 구입하면 항공사가 비즈니스석으로 올려줬다. 상임위원장 등 높은 분들이 탑승하면 퍼스트 클래스 자리가 비었을 경우 다시 업그레이드 해줬다.
-- 항공사가 의원들에게 좌석 등급을 올려주는 이유는 뭔가
▲ 100% 뇌물이다. 그게 뇌물이 아니라면 일반 국민에게도 그렇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일반 국민들은 마일리지를 쌓아야 그런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국회의원들은 KTX나 항공기의 일반석을 타서 시민들과 접촉할 기회를 갖는 게 좋다. 나의 경우, 국회의원 시절에 시민들 옆에 앉아서 사인도 해주고, 사진도 찍고, 그분들이 하소연하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게 큰 공부다. 의원실에 돌아와서는 들었던 그 내용을 보좌진과 함께 검토해서 조사하고 정책으로 만드는 일도 꽤 있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김홍신 [촬영 김연수]
-- 의원들은 왜 의원 회관에 있는 내과, 치과, 한의원, 이발소, 사우나, 헬스장 등을 공짜로 이용하나. 국회의원 가족들도 의원 회관 내 병원을 공짜로 이용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 당연히 말이 안 된다. 그게 모두 국민 세금이다. 나는 그런 걸 없애려고 의원 시절에 많은 노력을 했다. 나는 한 번도 국회 사우나를 이용해본 적이 없다. 국민이 국회의원의 이런 특권들을 빼앗아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회의원들은 지금부터 특권을 누리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을 해야 한다. 세비 1억5천700만원이나 받으면서 그런 걸 공짜로 이용하는 것은 나쁜 짓이다.
-- 국회의원 사무실이 1인당 45평인데, 국회의원이 이렇게 큰 공간을 갖고 있는 나라가 없다고 한다. 스웨덴 같은 나라에서는 의원 3∼4명이 같은 사무실을 쓴다고 하는데.
▲ 국회의원 1인당 45평으로 늘린 것은 잘못된 일이다. 이 정도의 평수는 생각보다 매우 넓다. 의원실을 보면 국회의원 방과 보좌진들의 방이 따로 있다. 의원 시절에 나는 의원 방과 보좌진 방의 벽을 허물었다. 그러니 누군가가 나에게 와서 로비할 수 없었다. 1대1 만남이 안 되는 데다 보좌진들이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의원 방에는 샤워실 겸 화장실도 있다. 국정감사 때는 보좌진이 밤을 새우곤 하는데, 나는 보좌진이 화장실 겸 샤워실에서 샤워할 수 있도록 했다.
국회의원 특권폐지 촉구 퍼포먼스 2024년 3월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보신각 앞에서 열린 국회의원 특권폐지를 위한 헌법개정 100만 궐기대회에서 나라사랑공생시민운동본부 회원들이 국회의원의 특권을 무너트리는 망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진]
-- 급여를 적게 주면 유능한 사람이 국회의원을 안 할 것이라는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 오히려 질적 수준이 높은 사람이 국회에 들어온다. 돈과 특권을 내려놓고 명예와 권위만으로 일하겠다고 하면 그 사람은 달라지기 때문이다. 기업의 전문가, 능력을 인정받은 대학교수, 중소기업에서 실력을 쌓은 사람, 전투기 분야 생산에서 기술력을 가진 사람 등 여러 분야에서 놀랍도록 능력 있는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될 것이다,
-- 이번에 국회의원이 된 사람들도 자기들 특권 문제에 침묵을 지키는데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 국회의원이 되면 누리는 게 아주 많다. 그러니 그걸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동료 의원들에게 미움을 받을까 봐 나서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 어떻게 해야 하나.
▲ 위원회를 만들어야 한다. 이곳에서 세비도 조정하고, 중대선거구로 할지 여부 등 정치개혁 문제도 이곳에서 다루도록 해야 한다. 다만, 정당은 그 위원회에 사람을 파견해서는 안 된다. 국회의원 특권 문제는 반드시 해결될 것이다. 다만 시간이 걸릴 뿐이다. 이게 안 되면 대한민국의 정치는 큰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취재지원 이은도 김연수 인턴 기자)
keunyou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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