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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에 비친 간병인 환자 폭행 찍혔는데...법정서 드러난 반전

일산백송 2022. 8. 4. 16:17

창문에 비친 간병인 환자 폭행 찍혔는데...법정서 드러난 반전

중앙일보

입력 2022.08.04 12:00

70대 환자를 폭행한 혐의를 받았던 간병인에게 무죄가 확정됐다. 병실 내 다른 환자의 보호자가 몰래 영상을 찍어 넘겨주는 등 극적으로 증거가 생겼지만, 법원은 피해자가 겪고 있던 뇌 수술 후유증에 주목했다. 대법원 3부(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검사의 상고를 기각해 무죄를 확정한다고 4일 밝혔다.

중앙포토

70대 여성인 피해자는 지난 2019년 1월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을 받은 뒤 5개월가량 요양병원에서 지내다 머리를 또 다쳤고, 다른 병원으로 옮겨 간병인 A씨를 만나게 됐다. 피해자는 이 병원에서 뇌수술을 한 차례 더 받아 7월 30일 퇴원했고, A씨와는 입원한 20일 내내 매일 함께 지냈다.

폭행은 퇴원을 1~2일 앞둔 7월 28일과 29일에 벌어진 것으로 조사됐다. '가족들과 면회를 했는데도 A씨의 간식을 사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28일 저녁 8시쯤 병실에서 피해자의 팔과 다리를 꼬집고 비틀었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29일 밤 10시에도 A씨가 손가락으로 유두를 비틀거나 주먹으로 턱밑 부위를 수차례 때렸다"고도 주장했다.

29일에는 피해자가 "사람 좀 살려줘"라고 말하는 소리가 영상에 녹음되기도 했다. A씨가 침대 커튼을 치고 팔뚝을 때리는 장면이 창문에 비쳤고, 이를 본 다른 환자의 보호자가 영상을 몰래 찍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영상에는 주먹으로 턱밑 부위를 때린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30일 피해자의 보호자가 병원에 오자, 병실 다른 환자는 '우리 딸 영상 녹화 있어요'라는 내용이 적힌 메모를 건네줬다. 이 메모를 건네받은 피해자의 보호자는 영상과 함께 진정서를 경찰에 내 수사가 시작됐다.

 

◇1심에선 유죄…"영상도 위법 증거 아냐"

 

지난해 7월 1심 재판부는 A씨의 폭행 혐의를 인정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가 범행 일시에 다소 혼돈을 보인다"면서도 "사건이 일어난 때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난 점을 고려하면 검찰이나 법정에서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지 못할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1심에서는 영상의 증거 능력도 쟁점이 됐다. A씨 측은 타인 간의 대화를 몰래 녹음해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한 영상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람 좀 살리주소"는 단순한 비명에 지나지 않아 '대화'로 볼 수 없는 점, 소리를 듣게 된 동기와 상황 등을 고려하면 위법한 증거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2심 '반전' 이유는…"섬망 증후군 때문에 침대에 묶은 것"

 

결론은 2심에서 뒤집혔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겪던 섬망(譫妄) 증후군에 주목했다. 섬망 증후군은 주로 알코올·약물 중독 환자의 금단 증세로나 뇌수술을 받은 고령 환자에게 나타난다. 주의력 저하나 환시(幻視), 과다행동(안절부절못함, 잠을 안 잠, 소리를 지름, 주사기를 빼냄) 등이 동반된다. 피해자의 딸들 역시 섬망 증상이 있던 점은 인정하고 있는데, 이를 고려하면 피해 진술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는 A씨가 팔을 고정할 수 있게 묶어놓는 장갑을 끼우고 폭행했다고 줄곧 진술했다. "하지만 당시 피해자가 주삿바늘을 빼는 등의 행동을 해 고정 장갑을 끼웠던 점을 고려하면, 장갑을 끼우는 과정에서 피해자가 몸부림을 쳐 A씨가 제지하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재판부는 영상이 찍힌 날 범행도 다시 들여다봤다.

피해자 진술에 따르면 A씨가 "쥐도 새도 모르게 너 같은 거 죽일 수 있다", "칼도 갖고 다니고 망치도 갖고 다니고 때에 따라 아무도 모르게 귀신같이 죽여버린다"고 얘기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상에 이런 소리는 확인되지 않았다. 

영상을 찍은 당사자 역시 팔뚝을 때리는 장면 외에는 본 게 없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재판부는 피해자가 가렵다고 한 부위를 가라앉히기 위해 팔뚝을 쳐줬을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다. 

피해자가 맞았다고 한 부위에 특별히 외상이 확인되지 않는 점도 고려했다.

2심 재판부는 지난 4월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A씨가 일관적으로 혐의를 부인하고 있고 혐의를 인정할 직접적인 증거도 없다"고 설명했다. 또 대법원 판례를 들어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유죄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진술의 합리성과 타당성, 객관적인 정황에 비춰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신을 가지게 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대법원도 2심 판결에 문제가 없다고 보고 검사의 상고를 기각했다.

오효정 기자 oh.hyojeo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