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좀 달라" 외치다 숨진 청년, 어쩌다 41년만에 찾았나
소중한 입력 2021. 06. 15. 18:45 수정 2021. 06. 15. 19:30
'5.18 무명열사 묘'에 묻혀 있던 신동남씨의 기구한 사연.. 유족 "5월 마다 찾아오겠다"
[소중한 기자]
▲ 5.18민주화운동 당시 적십자병원 영안실에 41년 간 '무명열사의 묘'에 묻혀 있던 신동남씨를 비롯한 사망자들의
시신이 놓여 있다.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물, 물... 목말라요. 물 좀 주세요."
1980년 5월 20일 밤 광주 적십자병원에 총상을 입은 환자가 들어왔다.
당시 중환자실 수간호사였던 박미애씨는 "뒤에서 총을 맞아 창자가 앞으로 나왔던 기억이 있다"라고 떠올렸다.
환자는 곧장 수술을 받았지만 5월 21일 숨을 거두고 말았다. 박씨는 그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수술을 마치고 나온 그 환자가 응급실 맨 안쪽에 누워있었어요.
여름이라 그런지 굉장히 부패한 냄새가 진동을 했었죠.
계속 목마르다, 물 좀 달라고 호소했었는데 그날 저녁을 못 넘기고 돌아가셨어요."
병원을 찾았던 친척동생 이아무개씨도 그의 마지막을 기억하고 있었다.
"(광주) 중흥동 여인숙에서 셋이 살았어요. (5월 21일) 새벽에 전화 받고 병원에 왔죠.
수술하고 침대에 있는 거 확인하고 오후에 또 들어오니까 그때까지 살아 계셨어요. 한 15분 있었나.
침대에 묶여 있는 형한테 '형 빨리 나아'라고 이야기했죠. 형은 말을 제대로 못했어요. 그냥 '물, 물' 이것뿐이었죠.
그리고 다음날 (5월 22일) 와보니 (형이 병상에) 없어요. 죽어버려서 이 자리(영안실)에 가 있었던 거죠."
이후엔 아예 시신도 찾을 수가 없게 됐다.
"(잠시 나갔다가) 다시 병원에 왔는데 영안실에도 시신이 없어요.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물어볼 사람도 없고, 그때 소문만 들려왔거든요. '군인들이 다 싣고 가서 암매장해버렸다더라' 이런 소리만 떠돌았어요."
이름 잃어버린 41년
▲ 국립5.18민주묘지 '무명열사의 묘'에 묻혀 있다 41년 만에 신원이 확인된 신동남씨의 동생이 15일 묘지를 찾아 참배했다.
ⓒ 소중한
2021년 6월 15일 국립5.18민주묘지에 검은 옷을 입은 신아무개씨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와중에 한 '무명열사의 묘' 앞에 선 그는 국화를 무겁게 내려놨다.
"형을 이렇게 찾았으니까 제가 살아있는 동안은 자주 찾아와야죠. 매년 5월마다 찾아와야죠."
신씨는 묘비 옆에 적힌 '4-90'이란 번호를 사진에 담으며 "왔을 때 형을 못 찾으면 안 되니까"라고 곱씹었다.
그의 발걸음으로 인해 이제 이 묘는 '무명열사' 대신 '신동남'이란 이름을 갖게 됐다.
그 이름을 찾는 데 41년 세월이 흐르고 말았다.
앞서 소개한 사망자가 바로 41년 동안 이름을 잃은 채 묻혀 있던 1950년생 신동남씨이다.
지난해 1월 출범 후 행방불명자에 대한 조사를 이어온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아래 조사위)는
무명열사로 있던 신씨의 신원을 확인해 15일 공식 발표했다.
▲ 국립5.18민주묘지 '무명열사의 묘'에 묻혀 있다 41년 만에 신원이 확인된 신동남씨의 동생이 15일 묘지를 찾아 참배했다. 참배 전 기자간담회에서 송선태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장이 조사 결과를 신씨의 동생에게 전달했다.
ⓒ 소중한
조사위가 확인한 신씨의 사연은 너무도 기구했다.
우선 그의 사촌동생 이씨가 "다시 병원에 왔는데 시신이 없다"라고 말한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5.18 당시 꾸려진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5월 22일 시내 병원의 모든 사망자를 전남도청으로 옮겨와
신원 확인 작업을 진행했고 이후 상무관에 안치했다.
이씨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신씨의 시신도 전남도청으로 옮겨진 것이다.
이때 한 실종자(이금영)의 어머니가 신씨의 시신을 자신의 아들이라 착각하고 만다.
당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광주가 얼마나 큰 참상으로 뒤덮여 있었는지 잘 알 수 있는 사례다.
결국 그 실종자의 어머니는 망월공원묘지(구묘역)으로 시신을 옮겨 매장했는데,
이후 아들이 시위 도중 연행돼 구금돼 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해당 묘는 그때부터 신원미상의 상태로, 이후 국립5.18민주묘지(신묘역)으로 이장돼서도 무명열사의 묘로
41년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신씨의 가족들은 1993년, 1994년, 1998년 세 차례에 걸쳐 그의 행방불명 사실을 신고했지만 국가로부터 5.18 사망자로 인정받지 못해 사실상 포기한 채 삶을 이어왔다.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5.18 당시 수많은 사상자가 거쳐간 광주 적십자병원의 기록을 확인하고 있다.
ⓒ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그러던 중 조사위는 국립5.18민주묘지에 있는 무명열사의 묘 5기를 대상으로 집중조사에 들어갔다.
그때까진 묘의 주인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우선 당시 작성된 검시 기록과 병원 기록을 뒤지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적십자병원의 '광주사태환자 실태조사철', '5.18소요사태 부상자 실태조사', '진료비 청구서'를 통해 '심복남', '심봉남' 등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사위는 이 이름이 행방불명 사실을 신고했다가 불인정된 '신동남'과 유사하다는 점에 착안해 본격적인 추적에 들어갔다.
이번 조사를 주도한 허연식 조사위 조사2과장은 "당시 적십자병원 진료기록에 사망자 22명의 명단이 있었는데
이 명단에 있던 (신동남과) 비슷한 이름들로 인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할 수 있었다"라며
"이번 확인 과정에서의 결정적인 동인이 당시의 병원 기록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조사위는 추가로 병원 기록과 당시 광주지방검찰청 신원미상 사망자의 검시보고서 등에 담겨 있는 내용을 토대로 사인 및 시신의 이동 경위를 파악했고, 최종적으로 신씨의 동생의 혈액을 채취해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다.
부계에 의한 친족관계 여부를 확인하는 Y-STR 방식의 검사 결과 유전자좌 23개 중 21개가 일치했고,
가족관계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SNP 방식의 검사 결과 99.99996%이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수많은 행방불명자들
최초 국립5.18민주묘지에 있던 무명열사의 묘는 총 11기였고,
2001년 이장 과정에서 유전자 검사를 진행해 6기의 신원이 확인돼 5기가 남아 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추가로 신씨의 신원이 밝혀지며 무명열사의 묘는 4기만 남게 됐다.
4기 중엔 4살로 추정되는 어린 아이의 묘도 포함돼 있다.
뿐만 아니라 5.18 당시 행방불명됐다가 지금까지 유해조차 찾지 못한 사례도 많다.
송선태 조사위 위원장은 "나머지 네 분에 대해선 지금까지 채혈된 190여 가족, 386명의 혈액을 토대로
정밀 대조할 방침"이라며 "뿐만 아니라 광주교도소에서 발굴된 262구 및 암매장 추정 장소 해남 1곳, 목포 1곳,
광주 인근 1곳에서 발굴될 유골과도 대조해나갈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지금 58명의 계엄군들이 직접 암매장 혹은 암매장 목격에 대한 진술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 장소에 대해 추후 발굴도 진행할 것"이라며
"행방불명자 한 분이라도 유족을 찾길 기대하며 조사위는 이 작업을 확대해나가겠다"라고 덧붙였다.
▲ 국립5.18민주묘지 '무명열사의 묘'에 묻혀 있다 41년 만에 신원이 확인된 신동남씨의 동생이 15일 형의 묘비에 적힌 묘지번호를 사진에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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