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산모 표현 쓰지 마세요" 정부 대신 만든 임신 중지 가이드
박소영 입력 2021. 01. 16. 14:00 수정 2021. 01. 16. 15:28
의료인·상담자 대상 '임신중지 가이드북' 발간
상담자와 의료인을 위한 임신중지 가이드북을 만든 시민단체 '셰어'의 최예훈(왼쪽) 기획위원과 나영 대표. 박고은 PD
“이제 임신중지는 부모나 상대방 남성 등 제3자의 동의 없이도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 본인의 의지만으로 이뤄질 수 있게 됐죠. 상담사와 의료인은 이를 바탕으로 올바른 정보와 선택지를 제시하고 여성의 선택을 지원해야 합니다.”
'낙태죄'가 사라진 2021년.
아직 합법적 임신중지를 위한 의료 서비스 추진 체계는 갖춰지지 않았다.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도, 다양한 환경의 여성을 마주하는 상담사도, 수술을 집도하는 의료인마저도
임신중지가 합법화한 세상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은 여전히 없다.
낙태죄 폐지 운동을 이끌어온 시민단체인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이하 셰어)의 활동가들과
산부인과 전문의들은 지난해부터 낙태죄 없는 세상에서 사용될 가이드북 마련에 머리를 맞대왔다.
정부가 관련 법 개정을 핑계로 미뤄온 작업에 먼저 팔 걷고 나선 것이다.
그 결과 지난해 12월 ‘상담자와 의료인을 위한 임신중지 가이드북 곁에, 함께’가 나왔다.
정보 제공과 상담부터 사후관리까지 임신중지에 대한 포괄적 지원을 목표로 했다.
상담할 때 필요하거나 피해야 할 표현부터 임신중지를 위한 약물 치료, 수술 방법까지 담았다.
성폭력을 당한 내담자나 청소년·이주여성·장애여성 등 별도 지원이 필요한 경우의 상담 지침도 마련해 실었고,
셰어 홈페이지에서 가이드북 전문을 다운받을 수 있게 했다(바로가기).
가령 지금까지는 임신중지 상담 중에 '아기'나 '엄마', '산모' 같은 표현이 여과 없이 쓰였다.
일상적인 단어들이지만, 출산이나 양육을 전제한 표현이기 때문에 임신중지를 원하는 내담자에겐 죄책감이나
부담감을 줄 수 있다. 중립적 단어인 '임신'으로 대체하거나 그냥 내담자의 이름을 쓰는 게 낫다.
'가족들 도움을 받으면 된다'는 등 내담자가 주위와 특정 관계를 갖고 있음을 전제하는 표현도
내담자가 마음을 여는 걸 방해할 수 있다.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관계자들이 지난해 12월 31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낙태죄 없는 2021년 맞이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8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만난 나영(활동명) 셰어 대표와 산부인과 전문의인 최예훈 셰어 기획위원은
“임신중지가 불법인 시기엔 임신중지 대신 출산을 유지하거나 출산 후 입양하는 방향으로 상담이 이뤄져 왔고,
시술을 하는 의료 현장도 법을 우회하는 방법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좀 더 실질적인 정보와 자료가 필요해졌다”며 가이드북 발간 이유를 밝혔다.
이들이 가이드북을 만들면서 주로 참고한 것은
세계보건기구(WHO)의 임신중지 가이드라인과 1988년부터 임신중지가 합법화한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의료인 대상 가이드북이다.
나영 대표는 “임신중지 여성들에게 동일한 안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이주민·성소수자·HIV(에이즈) 감염인 등
다양한 사례에 대해 갈수록 세분화한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의료진도 임신중지를 여성의 권리라는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말했다.
최 기획위원은 “의료인들은 지금까지 정규 교육과정에서 직접 인공 임신중지를 배우지 않았지만
자연유산을 종료하는 의료 행위가 사실 인공 임신중지와 크게 다르지 않아 기술적인 부분은 우회적으로 배워왔다”며
“임신중지에 대해 부정적 낙인을 찍어온 사회적 인식을 바탕으로 임신중지를 대해왔던 일부 의료인들의 시각이 바뀌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들이 가이드북을 통해 의료진과 상담사에게 제시하는 원칙은
△경청하기
△예단하지 않기
△성찰하기
△내담자를 신뢰하고 존중하기다.
나영 대표는 “여성은 다양한 상황에서 임신을 하고 임신중지를 결정할 수 있다.
슬프고 힘들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감정적 지지가 필요한 경우도 있지만 정보 제공만 필요할 수도 있다. 어떤 상황에서 왔는지를 상담사나 의료진이 예단하지 않고 우선 경청한 다음 선택지를 제시한 뒤
여성의 선택을 지지하고 확신을 주는 방식의 도움이 단계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도 남았다.
나영 대표는 “건강보험 적용과 수가 조정, 유산유도제 도입을 임신중지 관련 정책의 우선 순위 과제로 진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임신중지뿐 아니라 생애 전반에 걸친 성(性)과 재생산에 대한 올바른 정보 제공도 필요하다.
나영 대표는 “임신중지가 유방암을 유발한다는 식의 근거 없는 정보나 임신중지 약물에 대한 잘못된 정보 등이
검증 없이 온라인에 퍼져 있다”며
“외국에서는 임신중지뿐 아니라 피임과 성 건강, 임신에 이르기까지 성과 재생산에 대한 폭넓은 정보를 제공하는
공식 웹사이트를 만들고 핫라인까지 연결해 정보 접근성을 높이면서 지원도 용이하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임신중지를 원하는 여성을 대하는 상담사가 알아야 할 의료 정보를 담은 가이드라인. 셰어 제공
박소영 기자 sosyo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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