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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이야기

이혼할 이유가 수십 가지라는 미숙이, 난 딱 한 가지인데..

일산백송 2019. 2. 23. 07:28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이혼할 이유가 수십 가지라는 미숙이, 난 딱 한 가지인데..

입력 2019.02.23. 03:02

 

[별별다방으로 오세요!]

수십 가지 이유를 들어 단 하나의 이유를 덮어버린다면 그건 비겁함이겠지요. 그렇다면 단 하나의 이유를 들어 수십 가지 이유를 묵살한다면 그건 뭘까요? 어리석음이 아닐까요? 인생은 때로 우리에게 택일을 요구합니다. 비겁이거나 어리석음이거나. 그럴 때 우리는 용감하게 선택해야 합니다. 비겁이든, 어리석음이든. /홍여사

 

일러스트=안병현

 

"당신 괜찮아? 저녁 내내 말이 없던데…."

"내가 그랬나? 미안해요. 생각 좀 하느라…."

 

"당신 친구 미숙씨 일이라면 걱정하지 말아요. 이혼이 말처럼 그리 쉬운 게 아니니까."

 

남편은 알람을 확인하고 휴대폰을 협탁 위에 내려놓습니다. 안경을 벗고, 베개 위에 머리를 반듯이 뉘고 언제나처럼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당기더군요. 나도 불을 끄고 내 이불 속으로 찾아들며 말했습니다.

 

"난 상상이 안 될 뿐이에요. 그렇게 미워하고 싸우면서도 수십 년을 함께한다는 게."

 

내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남편은 더는 대꾸가 없습니다. 벌써 잠이 든 걸까요? 숨소리가 차츰 더 깊어지고 느려져 갑니다. 어두운 침실을 가득 채우는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낮에 친구에게서 들은 말이 문득 떠오르더군요. "너는 이해 못 해. 자상하고 단정한 남자와 평생 살아온 너는 내 심정 절대 몰라."

 

미숙이 말대로라면 그녀의 남편은 책임감이 없고, 충동 조절이 잘 안 되는 사람입니다. 게다가 술 문제도 있고, 그에 따르는 여자 문제도 깔끔하지가 않은 모양입니다. 그런 남자와 거의 평생을 살아낸 친구가 존경스러울 정도이지만, 한편으로는 넌더리가 나기도 합니다. 실은 오늘도 느닷없이 불려나가 그녀의 하소연을 듣고 왔습니다. 이번엔 기필코 이혼할 결심으로 당분간 기거할 집을 보러 다닌다더군요. 이혼 소리가 처음은 아니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결연했습니다.

 

"왜 안 자? 여태 잠이 안 와?"

 

잠결인 채로 남편이 묻습니다.

 

"가뜩이나 예민한 사람이… 남의 일에 괜히 신경 쓰지 마라니까."

 

남편은 내 오지랖이 못마땅한 기색입니다.

하지만 나는 친구의 결혼 생활이 걱정되어 잠 못 드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 친구의 얼굴이 너무 생생해서 점점 말똥해지는 중이었지요. 내 눈이 잘못된 걸까요? 미숙이는 오늘 별로 불행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열에 들떠 있는 얼굴이더군요. 희한하게도 그 친구는 부부 갈등이 극에 달할 때 얼굴에서 빛이 납니다. 갑자기 의욕에 불타 무슨 시술이며 치료를 받는 것도 대개 그럴 때이지요. 내가 보기에 미숙이는 이번에도 이혼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말로는 이혼만이 살길이라고 하고, 전에 없이 강한 제스처도 보이고 있지만, 실제 이혼에 이르지는 못할 것임을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아는 듯했습니다. 그토록 많은 상처를 주고받았고, 앞으로 아무 희망이 안 보인다면서도 그들은 아직 갈라설 생각이 없는 모양입니다. 뭘까요? 하나에서 열까지 맞지 않는 그 두 사람을 여태 묶어두는 것은….

 

"뭐겠어, 미운 정이지."

 

곁의 남편이 불쑥 대답하는 바람에 놀라고 말았습니다. 내 혼잣말이 입 밖으로 새어나왔음을 그제야 알았지요. 남편은 끄응 하는 신음을 토해내며 등 돌려 눕더군요. 미운 정이라…. 그건 어떤 걸까요? 어쩔 수 없이 보아야 하는 누군가의 뒷모습 같은 걸까요?

 

누구 하나 이혼을 한다면 미숙이보다는 내가 먼저 하게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미숙이에겐 이혼해야 할 이유가 자질구레하게 수십 가지이지만, 내게는 딱 한 가지이니까요.

 

2006년 여름 나는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남편의 비밀을 말해주는 몇 건의 수상한 메시지와 몇 장의 아련한 사진들을 말입니다. 그동안 막연히 느껴온 남편의 미묘한 변화가 한꺼번에 이해되더군요. 내처 카드 내용과 통화 목록까지 뒤졌다면 더 많은 것을 샅샅이 알게 되었겠지요.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여 어디까지 갔는지. 하지만 저는 그대로 덮고 말았습니다. 본 것들을 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남편에 대한 믿음이었는지, 가정을 지키려는 안간힘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현실을 직면하기가 두려웠던 것도 같습니다. 남편의 뒷모습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던 거죠. 그는 참 자상하고 단정한 사람이었거든요. 장점이 수십 가지인 사람이었거든요.

 

결국 내 비겁함이 이겼습니다. 남편은 떠나지 않고 되돌아왔으니까요. 하지만 원래의 그 자리로는 아니었죠. 가정으로 돌아오고도 남편은 나를 찾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길 잠자코 기다리니 남들이 부러워하는 평화로운 노년의 초입에 도달하기는 하더군요. 그런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영광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같이 밥 먹고, 서로 돌보며, 추억을 되새기는 부부의 일상. 하지만 나는 이따금 궁금해집니다. 남편이 더 빈 껍데기인지, 내가 더 빈 껍데기인지…. 차라리 그때 비명을 지르며, 진실을 파헤쳤더라면 어땠을까요? 우린 헤어졌을까요? 아니면 미운 정을 흠뻑 들이며 이만큼은 살아냈을까요? 피투성이 미운 정이, 지금의 냉정보다는 나았을 테지요.

 

"여보, 자요?"

 

대답 대신 남편의 숨소리가 커집니다. 자고 있다는 뜻이겠죠. 당신도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잠을 청하라는 뜻이겠죠. 하지만 나는 굴하지 않고 말을 잇습니다.

 

"나 실은 당신한테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남편은 꿈쩍하지 않습니다. 신음도, 뒤척임도 없습니다. 고른 숨만 규칙적으로 쉬며 눈꺼풀로 온몸을 덮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지금 나쁜 꿈을 꾸고 있다고 믿고 있는 걸까요? 현실에서는 보지 못한 우리의 뒷모습을 마주하는 꿈을?

 

※실화를 재구성한 사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