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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이야기

유서 깊은 여고에서 벌어진 '스쿨미투'

일산백송 2018. 12. 8. 19:28

SBS

[취재파일] 유서 깊은 여고에서 벌어진 '스쿨미투'

임태우 기자 입력 2018.12.08. 14:24 수정 2018.12.08. 14:24

 

서울에서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한 여자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 [단독] 여고생들 "교사 성희롱 못 참아" vs 학교 "사실무근" / 12.06 8뉴스)

 

이 학교 3학년 학생들 15명이 지난 4일 아침 7시 50분쯤 대자보 80장 정도를 교내 곳곳에 붙였습니다. '성희롱 가해 교사들의 사과 및 처벌을 요구한다'는 제목의 대자보는 총 4장으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실제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했던 발언들이라고 주장하며, 각각의 발언이 있었던 시간과 정황에 대한 설명도 포함했습니다.

 

지난 4일과 5일에 걸쳐 교내 곳곳에 붙였다가 떼어진 대자보 일부.

 

학생들이 대자보를 붙이자마자 학교 측이 행정실과 경비 직원들을 동원해 30여분 만에 전부 제거했다고 학생들은 주장했습니다. 학생들은 다음날 아침에 대자보 100여 장을 다시 붙였고, 학교 측은 다시 제거했습니다. 대자보를 붙이고 떼는 소동은 이틀 동안 계속됐습니다.

 

■ 학생들 "생기부 때문에 말할 수 없었다…약자니까"

 

익명의 SBS 뉴스 시청자로부터 대자보 소동에 대한 제보를 받고 취재하는 과정에서 위 발언들을 직접 들었다는 재학생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수능이 끝나고 졸업을 앞둬 비교적 증언이 자유로운 3학년 학생들도 있었고, 취재에 응해도 될지 갈팡질팡하다가 아무래도 증언은 꼭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나온 1학년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학생들의 증언은 대체로 일관됐습니다. 몇몇 교사들의 부적절한 언행이 지속적이었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대자보에 있던 발언 정황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도 했고, 대자보에 없었던 내용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 A학생: "일단 얼굴 평가가 굉장히 많았고요. 예쁘게 생긴 애가 왜 이렇게 까칠하냐, 아니면 자습을 요청하는 학생에 말에 그러면 자기한테 애교를 한 번 부려봐라. 또 시험기간에 1, 2학년들이 같이 섞여서 앉는데 그 모습을 보고 '확실히 1학년들이 좀 더 프레시하다, 신선하다' 라는 얘기를 하시기도 하고."

 

▷ B학생: "올해 태풍 때문에 저희 학교 축제가 일주일이 연기된 적이 있었어요. 그 사실을 저희 반에서 언급하시면서 '1학년, 2학년 학생들이 남학생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단장을 하고 서비스할 준비도 다 해놨는데 태풍 때문에 축제가 미뤄져서 굉장히 서운해 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말씀을 하셨어요. 저희 학교 축제가 학생들의 주체적인 참여가 아닌, 남학생들을 위한 서비스로 치부하시는 것에 대해서 분노를 느꼈습니다."

 

▷ C학생: "선생님께서 '00이는 예쁜데, 왜 00이 엄마는 안 예쁘냐고 아빠는 예쁘냐'고 이런 식으로 저희 부모님까지 거론하면서 그렇게 얘기를 하셨고요. 그리고 제가 수업이 끝나고 질문을 하러 나갔는데 선생님께서 저보고 갑자기 뭐하러 나왔냐고 물어보시더니 질문 엿들으려고 나왔냐고 이리로 오라고 하면서 제가 끌려갈 정도로 손을 잡아 당기셔서 저는 화나서 얼굴 빨개지고 손을 뿌리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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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학생: "저보고 피부가 안 좋아졌다고 그러면서 왜 그러냐고 물어보고 갑자기 제 얼굴을 손으로 찌르고 수업 들어오자마자 제 이름 부르면서 노래 불러보라고 그러고, 싫다고 정색하니까 춤은 출 수 있냐고 계속 기분 나쁘게 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고 그랬습니다."

 

▷ E학생: "제가 아침에 혼자 일찍 와서 교실에서 자습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선생님께서 갑자기 들어오셔서 제가 바르게 앉아있었는데도 똑바로 앉으라고 척추를 쓸고 등을 만지시면서 자세 교정이라는 명목으로…."

 

왜 그동안 아무 말도 못 했느냐고 묻자, 그중 1학년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저한테 잘 보여야지 생기부 잘 써준다' 이런 식으로 얘기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제가 약자이니까 잘 말을 못 했던 것 같아요."

 

학생들은 대자보를 붙이고 학교에서 논란이 커지자 해당 교사들이 그제서야 자신들의 언행에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수업 시간에 사과하는 대신 '억울하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 '너희가 예민해서 잘못 들은 거다'라고 해명해서 더욱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학생들은 평소 언행이 지나쳤던 교사 3명을 해임하고, 나머지 교사들에게도 적절한 징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과 면담했던 교감은 '해임은 본인의 소관이 아니라 이사회의 권한이며, 다른 교사들에 대한 징계 역시 회의가 필요하다'며 요구사항을 대부분 묵살했다고 전했습니다.

 

■ 학교 측 "사실 확인 안 돼"

 

취재진은 학교의 입장을 듣기 위해 직접 학교에 찾아갔습니다. 그러자 학교 직원은 교장, 교감 선생님 모두 외부 연수 일정으로 자리에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마침 학교에 교무부장이 계셨고 수업이 오후 2시에 끝난다고 해서 계속 기다렸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겠다는 답을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이후 학교 측 책임자와 통화가 돼 입장을 물어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번 대자보 소동을 학생들과 소통이 잘 안 된 탓이라고 설명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학생들과 대화를 하고 있으니 보도를 자제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또 "지난 3월부터 학생들이 문제 제기를 해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고, 사실이 아닌 내용들이 기사화됐을 때 선생님들도 많이 힘들어하실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대자보 내용에 대해서는 "사실 확인이 안 됐다"라고 답했습니다. 최근 '미투' 분위기에 편승해 학생들이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측면이 있다고도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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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측이 보도를 자제해달라는 요청에도 취재진이 보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학년과 반이 동일하지 않은 다수의 학생들이 일관되게 증언하고 있다는 점(졸업생도 있었습니다), SNS를 통한 고발과 학교 측에 시정해달라는 학생들 요구가 지난 3월부터 지속돼 왔다는 점 등입니다.

 

특히 대자보와 같은 단체행동까지 있었던 점으로 볼 때 학생들의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다만, 진술의 왜곡 가능성이 있을 수 있고 언행 상황이나 맥락을 고려했을 때 쌍방이 느끼는 주관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학교나 교사의 명예를 보호하는 부분도 신경썼습니다.

 

취재기자로서 필자는 유서 깊은 역사의 해당 학교가 학생들과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랍니다.

 

임태우 기자eight@sb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