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콜센터 상담하면서 '빽빽이' 쓰라고? KT CS의 갑질
김태훈 기자 입력 2018.07.28. 13:10 수정 2018.07.28. 13:13
한 기업 콜센터에서 상담사들이 고객의 상담전화를 받고 있는 모습. (본 사진은 기사내용과는 관련 없음) / 경향신문 자료사진
“‘빽빽이’ 쓰라는 얘기 들으면 회사 나가라는 뜻인 줄 아세요.”
고객센터 상담사들에게는 두 종류의 ‘갑’이 있다.
하루 종일 수화기를 붙잡고 응대해야 하는 고객이 한편의 갑이라면, 다른 한편에는 상담평가 실적을 가지고 상담사들을 닦달하는 직장 상사라는 또 다른 갑이 있다. 갑을관계에 놓인 상담사들이 겪는 상사의 갑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빽빽이’다. 상담평가가 나쁘다는 이유로 고객과의 상담내역을 컴퓨터로 타이핑하는 대신 일일이 손으로 빽빽하게 기록하게 하는 것이다. 이 ‘빽빽이’가 부당한 업무지시를 넘어 퇴사를 종용하는 수단으로 버젓이 쓰이고 있다는 것이 일선 상담사들의 증언이다.
근로계약서 발급 의무도 위반 KT그룹 고객센터를 비롯해 공공기관과 민간기업의 고객상담센터를 위탁운영하는 KT CS에서 최근까지 지난 3년간 ‘빽빽이’와 같은 갑질이 반복된 것으로 드러났다. KT CS는 상담센터 소속 직원들에게 의무적으로 교부해야 할 근로계약서도 주지 않는 등 위법행위까지 저지른 것으로 나타났다. 또 상담업무시간 종료 후 후속 고객 서비스를 위해 초과근무한 시간에 대한 수당도 제때 지급하지 않았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KT CS 소속으로 한 외부 위탁기업 고객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는 ㄱ씨는 입사 후 신입 상담사를 대상으로 한 교육을 받으면서 황당한 교육내용을 들었다. 고객의 상담평가 성적이 나쁘면 ‘빽빽이’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빽빽이’는 엄포로 그치지 않았다. 상담사가 각각의 칸막이 안에서 상담용 전화를 받으며 컴퓨터를 들여다보기 바쁜 와중에도 이곳저곳에서 손으로 상담내용을 일일이 받아쓰는 동료 상담사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ㄱ씨 역시 ‘빽빽이’를 쓰라는 지시를 피할 수 없었다. 다만 부당하고 모욕적인 지시라는 생각에 ㄱ씨는 요구를 거부한 데 비해 다른 상담사들은 인사상 불이익이 두려워 군말 없이 ‘빽빽이’를 쓰거나 이를 견디지 못하고 퇴사했을 따름이다.
“콜센터 상담사로 여러 곳에서 일한 경험이 있지만 실제로 ‘빽빽이’를 시킨 곳은 이곳이 유일했다”는 ㄱ씨는 “평가가 안 좋은 상담사에게 ‘동석’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지적하고 또 지적하고 불러다가 업무 도중에 개별면담하는 등 매일 반복적으로 괴롭혀서 결국은 나가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동석’이란 고객상담센터 특유의 직장문화가 드러나는 한 단면이다. 고객센터는 감정노동의 강도가 센 데 비해 보수는 상대적으로 적어 이직률이 높고 신입 상담사들의 비율이 높은 직장이다. 업무가 서투른 신입을 교육한다는 명목으로 바로 옆에 ‘동석’해 일일이 업무내용을 알려주는 교육방식이지만 실제 교육을 담당하는 강사나 상사가 막말과 위압적인 언사를 일삼는 경우가 많아 사실상 벌을 받는 것이나 다름없이 여겨진다.
문제는 다른 고객센터에서도 발견되는 ‘동석’에 더해 ‘빽빽이’라는 사실상의 처벌이 기존 직원들이 결국 회사를 떠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KT CS의 사업보고서를 보면 이 회사의 정규직 고용규모는 2016년 9283명에서 2017년 8801명으로 5.2% 줄었다. 사업보고서를 확인할 수 있는 KT그룹 계열사 11곳 중 두 번째로 감소폭이 크다. KT CS의 사업 전분야를 통틀어 집계된 고용규모이긴 하지만 주요사업인 콜센터 위탁업무의 경우 정규직 규모는 줄어든 대신 신규채용은 비정규직 기간제 위주로 채용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게다가 ‘빽빽이’와 같은 통념을 벗어난 업무상의 제재는 휴식시간을 통제하는 데서도 나타났다. 매일 업무를 시작할 때 순번으로 정한 휴식시간 외에는 상담사들이 화장실을 가는 것까지 통제하는 식이었다. 비록 휴식시간 순번제와 같은 제재는 직원들의 반발로 중단됐지만 ‘빽빽이’와 같은 모욕적인 제재를 견디지 못하고 퇴사한 이들도 여럿이다. 이곳에서 일한 전직 상담사 ㄴ씨는 “일부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개는 나처럼 불이익이 두려워 속앓이만 하다 결국은 그냥 회사를 나오게 된다”며 “퇴사 후에 문제제기가 나와서 직원들이 근로계약서와 급여명세서를 받을 수 있게 됐다고 들었지만 나는 퇴사 전까지 구경도 못해 봤다”고 말했다.
회사 측 “개별 강사의 과도한 지시” 근로계약서는 근로기준법상 근로계약을 맺으면 즉시 서면으로 교부하게 되어 있고, 이를 위반할 경우 500만원 이하의 벌금이 사용자에게 부과된다. 그러나 ㄱ씨는 입사 후 3개월이 지나도록 근로계약서를 전달받지 못하자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접수했고, 올해 6월이 되어서야 회사는 ㄱ씨를 비롯한 고객센터 직원들에게 근로계약서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KT CS 관계자는 “고객센터가 이사를 하는 과정에서 행정업무가 밀려 근로계약서와 급여명세서를 제때 교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늦게나마 교부를 완료했다”며 “‘빽빽이’ 문제는 회사 차원의 방침이 아니라 개별 강사가 과도하게 내린 지시였고, 당시에도 상담사들이 강제로 쓰는 것이 아니라 거부할 수는 있었다. 이 문제도 앞으로는 재발하지 않게 조치했다”고 답했다.
하지만 일선 상담사들은 회사로부터 급여명세서를 받아본 뒤 고객센터 상담시간을 넘겨서도 이어진 업무에 대해서는 시간외 수당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은 사실이 발견됐다며 여전히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고객센터 업무의 특성상 상담업무는 상담시간 종료 전에 받은 마지막 전화를 끊는 시점에 업무 종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의 불만사항을 처리하고 해당 위탁기업에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매일 30~40분가량의 초과근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상담업무에 사용되는 프로그램 로그아웃 시간만 확인해도 쉽게 정산이 가능한 문제인데도 회사 측의 대처가 지지부진하다는 것이 상담사들의 주장이다. 한 상담사는 “시간외 근무시간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제3자 입장인 노동부에 진정을 내서 실제 초과근무시간을 확인하려 했지만 관리자에게서 진정을 취소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회사 측은 “초과근무가 확인되기만 하면 그에 따른 수당을 지급할 예정이며 현재는 확인 중이어서 당장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일단은 회사가 ‘빽빽이’와 같은 과도한 제재를 규제하겠다고 밝힌 데다 근로계약서 미교부와 같은 위법사항에 대해서도 시정을 위한 조치를 취한 상태지만 이러한 갑질이 재발하는 것을 막기 어려운 근본적인 문제도 있다. 최근 정부에서 범정부 갑질 신고센터를 설치하는 등 직장 내 갑질문제 해결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했지만 현행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령에는 ‘빽빽이’와 같은 사용자의 갑질을 규제할 내용이 없고, 급여명세를 직원들이 확인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마련돼 있지 않은 탓이다. 민주노총 서울본부 노동법률지원센터의 박성우 노무사는 “현재 법적으로 사용자의 갑질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가 부족하긴 하지만 갑질로 인한 퇴사나 징계 등 부당한 조치가 확인되면 그에 따른 법적 제재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라며 “근로계약서 미교부 등 명백한 위법사항에 대해서는 회사 측이 책임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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