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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이야기

용기 내 고발했지만.. "꽃뱀" 수군거림에 또 눈물

일산백송 2018. 2. 23. 06:33

동아일보

용기 내 고발했지만.. "꽃뱀" 수군거림에 또 눈물

입력 2018.02.23. 03:03 수정 2018.02.23. 03:13

 

[터져나온 #미투 번지는 분노]성추행 피해자 침묵 강요하는 사회

[동아일보]

 

“꽃뱀….”

회사 동료들은 A 씨(26) 뒤에서 그렇게 숙덕였다. 회사 동기와 상사 등 3명에게 연이어 성희롱과 성폭행을 당했지만 이를 신고한 A 씨에게 돌아온 것은 왜곡된 소문과 동료들의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A 씨는 ‘한샘 성폭력 피해자’로 잘 알려져 있다. 2016년 입사 연수 도중 동기에게 화장실 몰카를 찍혔다. 입사 사흘 만에 교육담당자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도움을 준다며 접근한 인사팀장마저 성적 접촉을 시도했다.

 

A 씨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회사 내 성폭력을 고발하는 장문의 글을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올린 건 지난해 10월이다. 회사에 문제를 제기했지만 아무도 그녀 편에 서지 않았다. 회사는 A 씨를 성폭행한 교육담당자 B 씨에게 고작 정직 3개월 처분을 내렸다. 성적 접촉을 시도한 인사팀장 C 씨는 해고됐지만 ‘혐의’는 횡령이었다.

 

사내에 신고한 사실이 알려지자 A 씨는 어느덧 ‘남자를 유혹해 돈을 뜯어내려 한 꽃뱀’이 됐다. B 씨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자 악성 소문은 사실로 굳어졌다. 하지만 A 씨가 고소를 취하한 건 B 씨의 시달림을 못 견뎌서다. 그 과정에서 합의금은 1원도 없었다.

 

회사는 뒤늦게 유급 휴직을 권하고 심리상담사를 소개해주겠다고 했지만 이미 정상적인 회사생활은 불가능했다. 결국 성폭력 피해를 폭로한 지 한 달 만에 사표를 냈다. 그 후 두 달간 집밖에 나가지 못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수군거리는 것만 같았다. 소셜미디어 계정은 모두 삭제했다. 그렇게 창살 없는 감옥에 갇혔다.

 

검찰에서 시작된 ‘미투(#MeToo·나도 당했다)’ 폭로가 문화계 등 사회 전반으로 번지고 있다. 하지만 이에 앞서 ‘권력형 성폭력’을 고발한 이들은 여전히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부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세상을 향해 ‘미투’를 외쳤건만 내부에선 조직을 배신한 가해자 취급을 받기 일쑤다.

 

지난해 김준기 DB그룹(옛 동부그룹) 전 회장에게 성추행을 당한 사실을 폭로한 여비서는 최근 회사 측으로부터 오히려 공갈미수 혐의로 소송을 당했다. 이러 사례를 지켜보며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들은 적극적으로 항의하기를 포기한다. 실제 2015년 여성가족부가 실시한 성희롱 실태조사 결과 성희롱 피해자의 78.4%가 ‘참고 넘어간다’고 했다. 그 이유에 대해 절반가량이 ‘문제를 제기해도 해결될 것 같지 않아서’라고 했다.

 

지난해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직장 내 성희롱은 728건이다. 2013년 370건에 비해 2배 가까이로 늘었다. 하지만 지난해 728건 중 76.4%에 이르는 556건은 행정종결 처리됐다. 피해자가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합의해 아무런 조치 없이 끝난 것이다. 재판에 넘겨진 것은 단 4건에 불과했다. 과태료 처분을 받은 97건을 합쳐 가해자가 처벌을 받은 건 전체 신고 중 14%도 되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직장 내 성폭력·성희롱 문제를 해결하려면 회사 내에 성폭력 처리제도 및 전담기구를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또 이 기구에 외부 전문가를 영입해 내부 입김에서 자유롭게 조사하고 처분을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변혜정 한국여성인권진흥원장은 “‘제 살 깎기’란 쉽지 않다”며 “외부위원들이 최종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해야 전담기구가 실효성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가해자에 대한 확실한 징계와 처벌도 뒷받침돼야 한다. 장다혜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많은 피해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신고 후 신상공개와 가해자에 대한 미진한 처벌”이라며 “사건 처리기준을 마련한 뒤 가해자의 징계사안에 대해 명확히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하경 whatsup@donga.com·이미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