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뉴스 속으로] VIP와 사진 찍히면 '스튜핏' 잘 숨어야 '그뤠잇'
박유미 입력 2018.01.27. 00:17 수정 2018.01.27. 07:45
평창 오는 20여개국 정상급 외빈
신입 외교관 등 84명이 의전 전담
동선·일정과 선호·기피 음식 파악
달리거나 웃거나 찡그려도 안 돼
개막일엔 정상만 타는 KTX 운행
평창선 눈길에 강한 사륜구동 제공
━ 평창 겨울올림픽 의전의 세계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연습과 훈련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선수들만은 아니다. 정상 외교를 담당하는 외교부 의전실도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40명의 의전실 인력에 해외 공관에 나가 있는 의전 경험이 풍부한 직원들까지 불러들였다. 정상들이 방한을 계기로 공식 외교 일정을 잡기도 하는 만큼 외교부 지역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이번 평창올림픽 기간 중 세계 20여 개국의 정상급 외빈이 한국을 찾는다. 한국에서 개최되는 국제 스포츠 행사에 참석하는 정상 규모로는 가장 많다.
이욱헌 외교부 의전장은 “평창에 오시는 정상들은 기본적으로 자국 선수들을 격려하기 위한 ‘사적 방문(private visit)’으로 분류되지만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의 예우나 편의를 제공하려고 한다”며 “다만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 정한 의전 프로토콜이 있어 이를 존중하면서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방한 귀빈들의 구체적인 명단과 실제 일정 및 의전·경호 등은 모두 보안 사항이다. 공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준비 상황을 살펴봤다.
25일 외교부·경찰청이 합동으로 평창 올림픽 정상 의전 수행을 위한 기동 훈련을 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이미지 크게 보기
25일 외교부·경찰청이 합동으로 평창 올림픽 정상 의전 수행을 위한 기동 훈련을 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개막식 당일에 ‘정상 KTX’ 달린다=영하 12℃까지 떨어진 한파가 몰아친 25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경찰박물관 앞. 일반 번호판 대신 ‘외빈 101’이 붙은 방탄 벤츠 리무진 차량이 미끄러지듯 출발했다. 앞뒤로 까만색 에쿠스 차량 5대와 이 차들을 경호하는 경찰차 6대, 경찰 오토바이 8대, 미니버스 2대가 함께 달렸다. 평창올림픽 개막을 보름 앞두고 정상급 인사들의 이동에 대비하기 위해 외교부와 경찰청이 함께 실시한 기동훈련이었다. 리무진 차량에는 ‘외빈역’으로 최해영 서울지방경찰청 교통지도부장(경무관)이 탑승해 실시간으로 상황을 점검했다. 이날 훈련은 서울 시내에서 인천공항까지, 다시 인천공항에서 시내 호텔까지 오후 내내 계속됐다.
외교부 의전실과 경찰 경호 인력이 함께 하는 이같은 기동 훈련은 이날을 포함해 세 차례 실시됐다. 서울에서 평창까지, 인천공항에서 서울의 호텔까지 왕복하며 실제 외빈이 움직일 도로를 따라서 돌발 상황 등을 점검했다. 지난해 12월 21~22일과, 1월 16일 서울~평창 간 훈련 때는 경찰차 90대와 헬기 1대가 동원됐다. 도로공사 관계자와 경찰 지구대장 등 70여 명이 모여 워크숍도 실시했다.
훈련 당시 고라니 한 마리가 도로로 튀어나오는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도 벌어졌다. 경찰 관계자는 “실제 상황에서는 차량을 갑자기 멈추면 연쇄 추돌이 우려되기 때문에 고라니를 치고 갈 수밖에 없다”고 지침을 줬다. 도로공사는 제설 상황에 대비해 구간별 장비와 인력 상황을 점검했다. 평창에서 정상에게 제공하는 차량으로는 눈길에 강한 사륜구동 차량도 준비하고 있다. 개막식 당일에는 서울과 평창(진부역)을 오가는 KTX 특별 열차도 편성된다. 정상들만 탑승하는 전용 열차다.
25일 최해영 서울경찰청 교통지도부장(왼쪽 둘째)이 기동 훈련을 위해 외빈용 의전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이미지 크게 보기
25일 최해영 서울경찰청 교통지도부장(왼쪽 둘째)이 기동 훈련을 위해 외빈용 의전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새내기 외교관이 정상들 밀착 수행=서울 종로구 도렴동의 외교부 청사 1층엔 지난해 12월부터 정상급 의전 태스크포스(TF) 사무실이 마련됐다. 이들은 평창올림픽 기간 중 방문하는 각국 정상의 의전을 담당하는 국별 연락관(DLO, Delegation Liaison Officer)이다. 각 정상과 해당 대사관, 우리 정부를 연결해주는 현장 요원이자 밀착 의전을 담당하는 ‘마크맨’ 성격이다. 평창 방문 기간에는 DLO들이 사실상 각국 정상들의 수행비서 역할도 한다.
이번 DLO는 지난해 12월 임용된 신입 외교관 31명(외교원 4기)과 외무 영사직 임용 예정자 34명, 민간 지원 인력 19명 등 총 84명이다. 이들은 2~4명이 한 팀을 이뤄 나라마다 맞춤형 의전 계획을 세운다. 공항-숙소, 숙소-행사장 사이의 동선을 미리 확인할 뿐 아니라 개별 일정, 선호·기피 음식까지 대사관을 통해 최대한 파악해 대비하고 있다. 김혜림 신입 외무사무관(26)은 “대사관과 수시로 통화하며 시간 단위로 정상의 일정을 확인하고, 요구사항이나 일정을 업데이트해서 계획을 계속 수정한다”고 설명했다.
민간 지원 인력으로 선발된 대학생 박찬서(24·경희대 국제학과 4)씨는 지난 23일 다른 DLO들과 함께 인천공항을 찾아 동선을 점검했다. 정상급 인사의 경우 별도의 VIP 전용 통로를 이용하는데, 수속 및 화물 운반·검역 등을 포함하는 이동 시간을 30분 이내로 끝내는 게 의전의 기본이다. 박씨는 “인천공항 제2터미널이 만들어졌는데 VIP 전용 통로의 경우 접근성이 좋아 동선을 최소화하기엔 어려움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3~4차례 반복적으로 걸으면서 평균적으로 걸리는 시간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고 말했다. 여러 정상들이 입국하는 만큼 몇 분의 차이가 ‘의전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사전 연습은 필수다.
DLO는 경호팀과 함께 정상을 밀착 수행하는 만큼 태도나 복장도 중요하다. 이들의 수행 수칙에는 ▶달려서도 안 되고 ▶부산스러워서도 안 되며 ▶웃거나 찡그려서도 안 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행사장에서 정상과 함께 사진에 찍히지 않도록 기둥과 같은 지형지물을 활용해 잘 숨는 것도 노하우다.
올림픽 기간 중 정상들을 밀착 수행하는 국별 연락관(DLO)들이 외교부 청사 1층에 마련된 반다비·수호랑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최승식 기자]이미지 크게 보기
올림픽 기간 중 정상들을 밀착 수행하는 국별 연락관(DLO)들이 외교부 청사 1층에 마련된 반다비·수호랑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최승식 기자]
◆지방 개최로 먼 동선이 복병=평창올림픽은 지방(평창)에서 행사가 열려 정상들이 서울과 평창, 강릉과 평창을 이동하는 일이 잦고, 겨울철 혹한에 대비해야 한다는 점이 복병이다. 서울에서 치러졌던 국제행사와는 달리 정상 의전상 최고난도 업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은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인 1988년 서울올림픽과 2002년 월드컵대회를 치른 바 있지만 당시는 국가원수급 방한이 적었다. 2010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나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는 서울 중심의 행사였다는 점에서 평창 올림픽보다는 수월했다. 평창올림픽 조직위원회는 방한에 대비하고 있다. 대관령의 최근 10년 간 최저기온은 영하 14.8℃, 최대 풍속은 12.9m/s다. 올림픽 개·폐회식이 열리는 올림픽 플라자에 방풍막과 히터, 난방 쉼터 등을 설치했다.
의전 부담은 또 있다. 과거보다 늘어난 바깥의 눈이다. 이욱헌 의전장은 “이제는 태극기 하나만 잘못 달아도 동영상이나 사진이 소셜미디어에 바로 올라올 수 있으니 과거보다 더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며 “늘 긴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 [S BOX] 2012년 핵안보회의 의전은 ‘전설’ … 60개국 정상 차량 1분 간격 도착
「 한국의 의전 실력은 국제 외교가에서도 인정받는다. 60여 명의 정상이 참석해 서울에서 열렸던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의전은 많은 나라들이 참고하는 다자회의 의전의 교범으로 꼽힌다.
행사장이 서울 도심 한복판이었는데 각국 정상들이 탄 차량의 회의장 도착이 1분 간격으로 계획대로 진행됐다. 정상들이 일시에 함께 모여 사진을 찍는 장면 역시 정상을 안내하는 국별 연락관(DLO)이 사전에 수차례 리허설을 하며 준비해 자연스럽게 한 자리에 서게 할 수 있었다. 당시 기획의전부장을 맡았던 오영주 외교부 다자외교조정관은 “2010년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를 치렀던 경험을 통해 실수를 줄였고, 무엇보다 행사를 앞두고 끊임없이 연습했던 결과”라고 설명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국가적으로 치러진 역대 최대의 행사였던 만큼 전 부처가 동원됐다. 갓 입부한 오 조정관 등 외시 22기 19명을 포함해 행정고시, 기술고시 신입 사무관 200여 명이 투입됐다. DLO같은 의전 역할 뿐 아니라 선수촌·홍보·언론 담당 등 다양한 역할이 맡겨졌다. 신입 외교관이었던 서정인 현 외교부 기조실장과 윤순구 차관보는 각각 이때 만난 전문번역요원, 자원봉사자와 결혼에 골인하기도 했다. 동기인 장재복 전 밀라노 총영사는 이후 의전과장·의전기획관 등을 거쳐 의전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았다. 」
박유미 기자 yumi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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