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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이야기

일본이 방치한 조선인 원폭 피해자

일산백송 2015. 8. 14. 13:20

일본이 방치한 조선인 원폭 피해자
시사INLive | 도쿄·이령경 | 입력 2015.08.14. 11:00

경상남도 고성군 영현면이 고향인 강주태씨(76)의 부모는 행상으로는 

생계를 꾸리기 힘들었던 까닭에 두 아이를 데리고 현해탄을 건넜다. 1935년께 일이다. 

야마구치 현 우베 시의 한 탄광마을에 자리 잡은 강씨의 아버지는 광부로, 

어머니는 광부에게 밥을 지어주는 일로 생계를 꾸렸다.

1944년 강씨의 부모와 형제가 히로시마로 이사한 이듬해인 1945년 8월6일 오전 8시15분. 

미국이 떨어뜨린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 시 상공 600m에서 폭발했다. 

결혼 후 한국으로 돌아간 누나를 제외하고 강씨의 부모와 강씨, 두 형, 남동생, 

그리고 어머니 뱃속에 있던 동생까지 온 가족이 피폭되었다.

이날 히로시마 인구의 63%에 달하는 20만1468명이 피해를 입었다. 

강씨 같은 조선인 피해자 5만여 명 중 3만명이 넘게 사망했다. 

조선인 피해자 수치를 만명 단위로만 표시하는 이유는 그 실상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어서다.

8월9일, 두 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 시에 떨어졌다. 

이곳에서도 피폭된 조선인이 2만여 명, 사망자는 1만여 명에 달한다. 


↑ ⓒAP Photo : 원폭 투하 70주년을 맞아 8월6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서 희생자 위령식이 열렸다. 


폭심지에서 2.2㎞ 정도 떨어진 미나미 초에 위치한 강주태씨 집은 원폭 폭풍에 휩쓸려 폭삭 주저앉았다. 

건물 잔해에 깔린 아버지와 동생을 어머니가 끌어내면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만화책을 들고 친구네에 놀러 가던 강씨는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지더니 양쪽 길가 지붕의 기왓장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고 기억했다. 미처 폭발을 피하지 못한 그는 파편에 맞아 여기저기 혹이 생기고 피를 흘렸다. 

피투성이에 무릎이 찢어져 뼈가 고스란히 드러난 채 정신을 잃은 큰형 강병태씨와 그런 형을 둘러업고 

돌아오던 어머니의 모습을 강씨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강씨의 어머니는 형을 치료하려고 원폭 피해자들을 치료해주는 센터를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당했다. 

어머니의 우리말 섞인 일본어를 들은 일본인 담당자는 '조선인에게 줄 약은 없다'라며 쫓아냈다. 

실제 조선인 피폭자들의 사망률이 일본인에 비해 훨씬 높은 데는 대다수 피폭 조선인이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숨을 거두었기 때문이다. 원폭이 투하된 지 70년이 지나도록 일본 정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시, 

그리고 한국 정부는 단 한 번도 조선인 원폭 피해자들의 실태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일찍이 고향을 떠난 조선인 상당수는 해방이 되고도 조선에 생활 기반이 없어서 일본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모국에서 전쟁이 일어나 고향으로 가기가 더 막막하게 됐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일본에 남기는 했지만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급급할 정도로 생활이 어려웠고, 재일 조선인에 대한 사회보장은 거의 없었다.

취학·취업·결혼 등 차별은 극심해지고 있었다.

결국 이들 중 많은 이가 북한행을 택했다. 

재일 조선인의 북한 '귀국'은 1959년 12월14일부터 1984년 7월25일까지 9만여 명에 달했다. 

북한행을 선택한 이들은, 없어진 나라 '조선'이 국적이고, '한반도 남부'가 고향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강주태씨 가족 중에서는 큰형 병태씨의 가족과 어머니, 막내 동생 기태씨가 1972년 북한으로 건너갔다.

누나는 남한, 주태씨와 셋째 형, 바로 아래 동생은 일본에 남았다. 



↑ ⓒ이령경 제공 :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귀국기념 시계탑' 하단부. 


생활보호 대상자이자 일본 내에서 민족운동을 펼치던 골칫덩어리 재일 조선인을 '처리'하고 싶었던 

일본 정부는 인도주의라는 명분하에 '북한행'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한국과 체제 경쟁을 하던 북한 정부는 사회주의를 우월하게 홍보하는 기회로 삼아 

재일 조선인을 적극 받아들였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와 북한 정부를 맹렬히 비난할 뿐 그들을 위한 정책을 펼치지 않았다.

히로시마에서 북한으로 건너간 재일 조선인 중에는 병태씨 가족처럼 원폭 피해자가 많았다. 

2008년 4월 북한 정부 발표에 따르면, 북한에 거주하는 원폭 피해자는 1911명에 달한다. 

그중 1529명(80%)이 사망했고 382명이 살아 있다. 

정부에 등록된 피폭자 가운데 나가사키 피폭자가 1074명이고, 히로시마 피폭자가 837명이다. 

특히 히로시마에서 피해를 입은 이들은 1959년부터 북한으로 건너온 이가 많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한구석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귀국기념 시계탑'이 서 있다. 

1959년 12월14일에 세워진 이 시계탑은 당시 히로시마에서 북한으로 건너간 79명이 

'평화 기원과 북·일 우호의 증표'로 세워 히로시마 시에 기증했다.

병태씨와 가족들이 1972년 북한으로 넘어갈 때만 해도 히로시마-평양-한국에 나뉘어 사는 데 

별다른 걱정이 없었다.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될 정도로 남·북 간에 화해 모드가 조성되었기 때문에 

머지않아 자유롭게 왕래하며 살 수 있으리라 여겼다. 

북·일 관계도 지금처럼 나빠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현실은 냉혹했다. 

히로시마에 사는 주태씨는 1972년 이후 2013년까지 11차례 평양을 방문해 가족들을 만날 수 있었지만, 

다른 피폭자 이산가족은 거의 왕래가 끊겼다. 


1990년 돼서야 '북한의 피폭자' 문제 알려져

1990년 8월1일, 병태씨가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원수폭금지세계대회에 북한의 원폭 피해자 대표로 초청을 받았다. 

병태씨는 자신이 살던 지역 인근에 10명가량의 조선인 피폭자가 있다면서 원폭 피해 후유증에 대해 

생생하게 증언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 정부는 '피폭자는 없다'고 발표해왔다.

피폭자들은 일본에서도, 북한에서도 피폭당했다는 사실을 숨겼다. 

자식들의 결혼에 지장이 있을까 봐 조심했던 것이다.

당시 18년 만에 일본을 방문한 병태씨는 히로시마에 남은 형제들과 환갑잔치를 했다. 

1990년 당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히로시마 현의 교육부장을 맡고 있던 주태씨는 형이 일본으로 오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형과 함께 일정을 보내는 동안 주태씨는 형의 '피폭자 건강수첩'을 신청해서 받아냈다. 

북한에 있는 다른 피폭자 가족들도 일본에서 피폭자 건강수첩을 받을 수 있도록 선례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를 계기로 북한에 있는 피폭자들이 일본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후 북·일 관계는 급격히 나빠졌고 북한의 생존 피폭자도 거의 숨을 거뒀다. 

2015년 7월, 결성 40주년을 맞은 히로시마 현 조선인피폭자협의회 이실근 회장은 1990년대부터 

북한 정부와 일본 정부를 상대로 북한의 피폭자 실태조사와 의료 지원 등을 요청해왔다. 

북한 정부는 이 문제에 소극적이고, 일본 정부는 줄곧 '국교가 없는 북한의 피폭자 지원은 어렵다'

'미사일과 납치 문제 해결이 선행되어야 한다'라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병태씨는 1994년 12월13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어머니 뱃속에서 피폭을 당한 막내 강기태씨는 1995년 5월, 마흔아홉이라는 젊은 나이에 뇌출혈로 숨졌다. 강씨의 어머니 역시 1979년 3월 일흔두 살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일본에 거주하던 셋째 형은 마흔한 살 되던 1979년에 뇌동맥 파열로 쓰러져 26년간 혼수상태로 있다가 

2005년에 숨졌다. 

주태씨는 '조선'적을 가지고 북한에 왕래했기 때문에 남한의 고향으로 돌아간 누나의 소식은 알 길이 없다.

이렇게 식민지 치하에 일본으로 갔다가, 해방 후 남한 또는 북한으로 떠나거나 일본에 남아, 

가족들은 여전히 이산가족의 세월을 산다. 그리고 그 세월에는 원폭 피해라는 상처가 켜켜이 쌓여 있다. 

주태씨는 이대로 북한의 피폭자 문제가 묻혀버릴까 걱정이 많다. 

원폭 투하 70년을 맞은 2015년 8월6일, 

이실근 회장은 히로시마를 방문한 아베 신조 총리를 만나 조선인 피폭자 문제 해결을 호소했다.

도쿄·이령경 (릿쿄 대학 겸임교수)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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