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운명 그것이 알고 싶다.

최고 이야기

전통무술과 현대무예무림의 고수들

일산백송 2015. 7. 11. 16:35

전통무술과 현대무예무림의 고수들
http://shbae3521.egloos.com/10376619
[특집] 한국 무림의 고수들 


전통무술과 현대무예무림의 고수들
“이~얍!” 한국의 무예에 세계가 ‘화들짝’
조민욱 기자 mwcho@chosun.com
입력 : 2005.02.20 09:39 01' / 수정 : 2005.02.20 10:23 05'

둥 둥 둥. 2004년 10월 5일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세계 103개국의 박물관·미술관·학계에서 

2000명 이상의 문화재 전문가가 참가한 세계박물관대회가 한창이었다. 

행사가 무르익어가던 중 느닷없이 북소리가 울리며 창·칼을 든 무리가 단상을 점령했다. 

손발에 행전 토시를 단단히 두르고 허리띠를 잘록하게 맨 것이 영락없는 조선의 무인(武人)들이었다. 

이어 펼쳐진 십팔기(十八技) 시연에 외국인들은 “한국에도 이런 무예(martial arts)가 있다는 것이 놀랍다”며 연이어 “원더풀”을 외쳤다. 

우리 땅에도 이처럼 강맹한 무예가 있었단 말인가. 한국 무림의 고수를 찾아나서 보자.

■건봉사 무문(無門) 스님-불가(佛家) 무술의 숨은 고수 


설악산 백담사 위로 길 아닌 길을 한참 올라가면 조그만 암자가 나온다. 봉정암이다. 

짧은 겨울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땅거미가 길게 깔릴 무렵, 암자의 좁은 마당에서 예사롭지 않은 소리가 들린다. 붕- 붕-. 묵직한 물체가 청량한 공기를 가르는 소리. 먼발치에서 보면 사람은 보이지 않고 봉의 궤적만 눈을 어지럽힌다. 무화(舞花)다. 사방팔방을 휘감아 돌던 봉이 훌쩍 크게 한 번 도약하더니 맹렬하게 땅을 내리친다. 쩡-. 맨땅에서 얼음장이 갈라지는 소리가 난다. 보통 공력이 아니다.
봉술은 예부터 스님들이 즐겨 다루던 무기로, 건신(建身)과 호신(護身)을 위해 익혔다. 깊은 산속에 살다보면 사나운 짐승이나 도적에 맞서야 했기 때문이다. 소림사가 중국 무술의 태두가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 절집에도 이런 고수가 있었다니. 대체 어떤 고인(古人)이 있기에 이토록 절묘한 기예를 보여준단 말인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돌아가던 봉이 멈추고서야 봉의 주인이 얼굴을 드러낸다. 하얀 김을 입으로 내뿜으며 연무를 마친 이는 다소 앳돼 보이는 스님이다. 무문(無門) 스님이다. 그토록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건만 호흡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고, 이마에 굵은 땀방울만 맺혔을 뿐이다. 내공이 심후한 탓이리라.
“무예는 속가(俗家)에서 배웠습니다. 출가해서는 수행의 방편으로 틈틈이 몸을 놀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스님의 속명은 배주현. 서울대 농경제학과 88학번으로, 학창시절 한국 도가(道家)의 큰 어른을 만나 무예를 전수받았다. 이를 일생의 큰 복이란다. 스님은 ROTC 장교로 최전방에서 군복무 후 잘나가던 대기업 엘리트 사원이었다. 하지만 뭔가 부족했다. 몸의 공부, 마음의 공부에 대한 갈망은 점점 커져만 갔다. 결국 1996년 강원 고성의 금강산 건봉사에서 출가를 했다.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 사명대사가 승병을 모아 무예를 연마하던 사찰이다. 이는 필시 인연이리라.
“불가(佛家)와 도가(道家)의 수련법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도가의 호흡법과 양생법은 불가의 참선, 좌선법과 크게 다르지 않지요. 수양을 통해 도를 깨우치는 것도 같습니다.”
스님이 즐겨하는 권법은 맹호권(猛虎拳)이다. 맹호권은 도가 문중에서 전해지는 오령권(五靈拳) 중의 하나인데 힘이 넘치고 활발하며 도약이 많다. 권(拳)을 펼치는 스님의 신법(身法)은 가히 놀랄 만한데 공중에 몸을 날려 연이어 차내는 발차기가 일품이다. 무림에 전설처럼 전해지는 비각(飛脚)이다. 이 또한 내공의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하다.
스님은 출가 후 동국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는데, 논문 주제도 선병(禪病) 치료에 관한 것이다. 참선을 하다보면 올바른 수행법을 몰라 병에 걸리는 경우가 많다.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를 선병이라 한다. 스님은 군복무 시절 무릎 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은 적이 있다. 의가사 제대 판정을 받았지만 끝까지 복무를 마쳤다. 도가의 양생법으로 인대를 치료한 것이다.
“몸의 공부에는 끝이 없습니다. 평생을 배우고 연마하며 공을 들여야 합니다. 출가한 몸으로 기예를 닦는 것은 남이 아니라 나를 깨뜨리기 위함이지요.”
‘산에 사는 사람이 왜 무예를 하느냐’는 우문(愚問)에 돌아온 답이다.


■조선의 국기(國技) 잇는 ‘인왕산 호랑이’-‘십팔기보존회’ 박권모 시범단장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산다. 땅거미가 어슴푸레 깔리기 시작하면 그가 나타난다. 

흰색 도복에 병장기를 단단히 거머쥔 모습이 영락없는 백호(白虎)다. 

사위(四圍)는 쥐 죽은 듯 고요하고 고개 넘어 인가에선 간간이 개 짖는 소리만 들려온다. 

한바탕 몸을 푼다. 번개처럼 몸을 솟구쳐 벼락처럼 때린다. 매서운 칼바람에 거송(巨松)도 바르르 떤다. 

호흡을 고르고 바위에 우뚝 멈춰서면 경복궁이 발 아래 있다. 

‘인왕산 호랑이’라고 불리는 박권모(38) 전통무예 십팔기(十八技) 보존회 시범단장이다. 

“인왕산 호랑이요? 허허. 집이 무악재인데 인왕산에 올라 수련을 하다보니 무우(武友)들이 그렇게 부르지요.”
서글서글한 눈매에 또렷한 이목구비, 날렵한 몸매는 마치 소설 속의 장길산을 연상케 한다. 그가 이끄는 시범단은 서울대·연세대 등 전국 20여개 대학의 무예동아리 졸업생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결같이 범 같고 용 같은 고수들. 작년 열린 세계박물관대회에서 지구촌 인사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무인도 바로 그들이다. 그 중에서도 박 단장의 실력은 발군이다. 그의 주특기인 쌍검(雙劍)과 월도(月刀)는 많은 무술단체들이 따라할 정도다.
월도는 큰 날에 긴 자루가 달려 있으며 말의 목을 벤다고 하여 참마도(斬馬刀)라고도 한다. 보통 사람은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월도를 박 단장은 마치 손오공이 여의봉 다루듯 능숙하게 휘두른다. 날을 세우지 않아도 상대의 뼈와 살을 으스러뜨리는 공력이 담겨 있다. 쌍검은 더욱 절묘하다. 두 자루 칼이 서로 조화를 부리며 톱니바퀴처럼 착착 돌아가는데 한치의 실수도 없다. 쉭 쉭, 검의 궤적을 따라 검화(劍花)가 흐드러지게 핀다. 상승의 경지에 오른 고수의 칼끝에서만 피어난다는 검화다. 강(剛)과 유(柔)를 겸전했다. 이런 절기가 한국의 무림에 있었다니.
십팔기는 훈련도감 등 오군영에서 익히던 조선의 국기(國技)다. 신라 화랑에서 유래한 본국검(本國劍), 동양 최고(最古)의 검법인 예도(銳刀) 등 18가지 기예로 이루어진 십팔기는 정조 때 편찬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수록된 무예의 정식 명칭이다. 일제시대 때 맥이 끊어질 뻔한 십팔기의 유일한 전승자가 바로 박 단장의 스승인 해범(海帆) 김광석 선생이다. 해범 선생은 무예의 대가이자 많은 민속학자와 종교계 지도자들이 ‘숨겨진 한국의 국보’라고 칭하는 인물. 한국 무림을 대표하는 명가(名家)인 해범 문중에서 20여년간 기예를 익혔다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박 단장은 뜻밖에도 ‘김&장 법률사무소’에서 특허업무를 하는 전문인이다. 낮에는 광화문으로 출근하고 밤에는 집 뒤 인왕산에 올라 무예를 연마한다. 간혹 밤손님으로 오해 받기도 한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정기시연과 인사동에서 무예 강습도 한다. 학창시절 항공대에서 모형 비행기를 만들던 경험을 살려 각종 병장기도 직접 만든다. 그는 “십팔기는 한 문중의 무예이기 이전에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며 이를 지키는 데 막중한 책임을 느낀다고 말한다.
“십팔기를 누가 만든 줄 아세요. 바로 사도세자입니다. 부국강병을 꿈꾸던 사도세자는 힘이 장사였을 뿐만 아니라 무예를 연마하던 무인 군주였지요.”
조선 무인의 기개를 잇는 그의 몸에서 호랑이의 포효가 들리는 듯하다.


■제자 150만명 거느린 ‘지구촌 사부’-서인혁 국술원


호령 하나로 지구촌을 차렷 시키는 사람. 미국, 유럽, 남미, 중동 등 29개국에 진출하여 800여개의 도장과 150만명의 제자를 거느린 거대한 문파의 지존(至尊)이 있다. 그는 ‘국술(國術)’이라는 무술 브랜드를 북미 3대 무술단체 중 하나로 키운 서인혁(66) 총재다. 국술은 권술 족술 포박술 봉술 검술 부채술 지팡이술 등 270기법 3608수(手)로 이루어진 종합무술이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서 무술의 기초를 배운 서 총재는 “젊은 시절 전국의 무술 문중을 다니며 각종 기예를 집대성하여 하나의 무술 체계로 만들었다”며 “우리나라의 무술이라는 뜻에서 ‘국술’이란 명칭을 붙였다”고 한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의리의 돌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다. 체구는 작아도 ‘서인혁’이라고 이름 석자만 대면 인근 불량배가 줄행랑을 놓을 정도였다. 국술을 보급하던 초창기에는 텃세를 부리는 토박이 주먹과 숱하게 싸웠고 그들을 제압했다. 1974년 그는 ‘국술의 세계화’를 결심하며 단돈 5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과감히 건너간다. 하지만 그곳은 고난의 땅이었다.
뉴올리언스에 첫 도장을 연 그는 변변한 방 한 칸 없이 다다미가 깔린 도장 마루에서 생활했다. 국술이라는 생소한 간판을 보고 중국 음식점인 줄 알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도장을 개관할 때마다 다른 무술단체와의 마찰은 끊임없었고, 도난사고나 싸움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총을 들이대며 위협하는 갱단도 있었다. 배고픔과 서러움이 밀려올 때마다 그는 검을 쥐고 휘두르며 ‘반드시 한국의 무술을 미국 대륙에 심고 돌아가리라’고 다짐했다.
개관 후 몇 주일이 지나도 회원이 한 명도 찾아오지 않자, 그는 주변지역의 학교나 단체를 일일이 방문해 무술 시범을 보인다. 6개월 동안 무려 300회 이상의 시범을 보였다. 그제야 하나둘 회원이 생기기 시작했다. 1991년 휴스턴으로 본부를 옮기면서 승승가도를 달린다. 1992년에는 미 육군사관학교의 정식 교육과정으로 국술이 채택됐고, 이듬해에는 미 육사에서 그에게 지휘검을 수여했다. 1993년에는 미국 무술대상을 수상했고, 1994년에는 미 공군사관학교의 지휘검을 받는다. 곧이어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지역에 국술원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공헌을 인정받아 그는 1998년에 대한민국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다.
세계의 온갖 무술이 각축을 벌이는 미국시장에서 한국어 구령을 쓰고 태극 마크 찍힌 도복을 입는 국술이 성공한 이유는 뭘까. 서 총재는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경영기법 때문”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미국에 진출한 다른 동양무술이 소규모 도장에 안주할 때 그는 서구식 경영기법을 과감히 도입하여 국술 명칭과 용품에 특허를 냈다. 지부 설립도 본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운영방식도 본부의 통제를 엄격히 받는다. 그 대신 본부는 각 지부의 설립과 운영을 최대한 지원한다. 국술을 믿고 구입할 수 있는 브랜드로 만든 것이다. 여기에다 예(禮)와 정(情)을 중시하는 국술원의 가족적 분위기도 서양인의 큰 호감을 얻었다고 한다.
“성공한 무인이라고요?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무술을 한 것뿐입니다. 한평생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다보니 남들이 그렇게 말하는 거지요.”


■일타육격!… 이것이 무술 태권도다!- 이광희 연무재 원장 


연무재(硏武齋)의 태권도는 확실히 독특하다. 

태권도의 몸짓은 일반적으로 직선이다. 그런데 연무재의 그것은 곡선이다. 

만련(慢鍊)이라 하여 느리게 움직일 때는 하나의 품새를 1분 정도에 마치다가 쾌련(快鍊)으로 들어가면 불과 10초 만에 끝낸다. 그것도 몸통과 팔다리를 격렬하게 비틀고 짜면서 말이다. 만련은 건강법이고 쾌련은 무술단련이다. 진각(震脚). 순간순간 격렬하게 발로 바닥을 구른다. 팔다리를 쭉쭉 펴거나 높이 차지도 않는다. 이단옆차기도 볼 수 없다. 

“뻣뻣하게 지르는 주먹은 위력이 없습니다. 하체를 낮추고 어깨의 힘을 빼고 허리를 쥐어짜듯이 비틀면서 주먹을 뿌려야 온몸의 파워가 실립니다. 발차기를 높이 하면 뭐합니까. 위력도 없고 상대방에게 잡히기 쉬울 뿐인데요. 무술에서는 금기죠.”
연무재 이광희(57) 원장의 무술 태권도론이다. 서초구 양재동에 자리잡은 연무재는 서울대 태권도부 동문의 수련공간이다.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64학번인 이 원장의 무술 뿌리는 초기 태권도 5대 도장 중 하나인 창무관(YMCA 권법부)이다. 윤병인 선생이 창건한 YMCA 권법부는 일본 가라데의 품새와 중국 팔극권(八極拳)의 권법과 공방법을 결합하여 독특한 태권도를 발전시킨 곳이다. 이 원장은 서울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2년부터 태권도를 배운다. 당시 창무관 건물은 서울시청 옆에 자리한 철도청 창고 건물이었다.
“창무관에서는 정말 혹독하게 수련했습니다. 몸통지르기 300회, 기본 발차기 1000회를 하고 나서야 품새 수련에 들어갔죠. 겨루기도 지금처럼 호구를 차고 발로 특정부위만 가격하는 것이 아니라 맨주먹 맨몸으로 무제한 공격과 방어가 허용되었습니다. 주먹으로 얼굴 때리는 것을 빼고는 말입니다.”
일격필살. 겨루기 도중 기절하는 사람이 속출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목숨 걸고 수련하였다. 자다가도 누가 몸을 건드리면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의 급소를 공격할 정도였다. 그는 창무관에서 8단을 딴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170㎝ 조금 넘는 키. 하지만 무서운 공력을 지녔다. 일타육격(一打六擊). 한 번 공격에 6번의 타격이 들어간다. 한 다리는 땅을 딛고 나머지 한 발과 두 손이 동시에 들어간다. 연이어 발을 바꾸어 또 한 번 발차기와 양손 공격이 들어간다. 끊어진 동작이 아니고 연속동작으로 이어지는데 마치 채찍을 휘두르듯 막힘이 없다. 기마민족의 말타기 자세에서 창안한 동작으로, 막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는 30년 이상 세계 각국의 무술을 비교 연구하여 오늘날 연무재류(流)라고 불려도 좋을 정도의 독특한 태권도를 만들었다. 특히 탈춤의 부드러운 몸짓을 태권도에 접목하였다. 현재 주류 태권도는 무술이라기보다는 스포츠다. 호구를 착용하면서부터 예전의 실전 기술은 사라지고 득점 기술만 남았다. 이 원장은 이러한 현실을 안타까이 여기며 초기 태권도의 강맹함을 이어가고자 한다. 그래서 봉술도 연마하고 표창도 던진다. 그의 가방에는 직접 갈아 만든 표창이 늘 몇 자루 들어 있다.
“태권도 품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차고 꺾고 던지는 무술의 모든 기술이 품새에 담겨있어요. 단지 지금 태권도를 하는 사람이 품새에 담긴 무술의 의미를 모를 뿐입니다.”


■ 화교 제일의 ‘고수’… 당랑권의 대사부-화교 우슈총회장 이덕강 노사 


신촌에 가면 ‘太乙門(태을문)’이란 간판이 걸린 도장이 있다. 

한국 쿵푸의 산실(産室)이며 한국무술사에 한 획을 그은 거목이 있는 곳이다. 

도장에 들어서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바닥에 깔린 10㎝ 두께의 황토다. 

흙은 오랜 세월에 다져져 반들반들 윤이 났다. 19세기 연무장에 들어선 느낌이다.
“중국 무술은 콘크리트 바닥이나 마루에서 하면 안 돼요. 한국에서 흙을 깐 곳은 아마 여기 한 군데뿐일 거요. 내가 한국에 와서 한 것은 별로 없지만 이것만은 알아줘야 해요. 표창받아도 될 거요.” 둥근 얼굴의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며 말문을 연다. 바로 한국 화교 우슈총회장인 이덕강(李德江·73) 노사다. 소림권 당랑권 등 중국무술의 대사부이자 생존해 있는 화교 중 최고수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인물이다.
이 노사는 18세 때인 1949년 한반도로 왔다. 중국 산둥성 옌타이(煙臺)에서 태어난 그는 11세부터 좌보귀(左寶貴) 장군의 호원(護員)을 지냈던 이영득(李永得) 선생의 문하에서 무술을 배운다. 장성하여 사업하는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 들어온 그는 처음엔 원산에 정착했지만 한반도가 전란에 휩싸이자 남쪽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원래는 인천을 거쳐 중국 본토로 들어가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미 공산정권이 들어선 고향 땅에 선뜻 들어갈 용기가 안 나더군. 결국 서울에 눌러 앉았지.”
이렇게 서울은 그의 제2의 고향이 되었다. 1960년부터는 중국대사관(당시는 대만과 수교를 맺은 상태)에서 화교에게 무술을 가르쳤다. 한국인에게 본격적으로 무술을 전수한 것은 1963년 장사동에 무술관을 열면서부터다. 이때부터 그에게 배운 제자가 지금 한국 쿵푸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는 권술과 여러 병장기에 두루 능통하지만 특히 창과 쌍칼(雙刀)을 잘 쓴다. 7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검을 쥐고 자세를 잡으니 검기(劍氣)가 온몸을 감싸는 게 한치의 빈틈도 없다. 가히 일가(一家)를 이룬 고수다운 풍모다.
그의 진정한 실력은 국내보다는 오히려 외국에 더 알려져 있다. 홍콩 대만 등지에서 많은 무술대회에 참가해 시연을 펼쳤으며 1976년에는 대만 무술대회에서 라문창(羅門槍)이라는 전통 창술을 표연하여 금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에선 시연을 보인 적이 없다. 이 때문에 수많은 제자도 그의 진정한 실력을 아는 이는 드물다. 남이 있는 곳에서는 절대로 개인 수련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가르칠 뿐이다. “무인은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누구나 필살기를 연마해요. 문중에서 내려오는 이러한 비전(秘傳)을 함부로 남에게 보여줘서는 안되죠.”
그는 “무술은 첫째가 건강, 둘째가 치료 효과, 그 다음이 호신(護身)”이라면서 지금은 건강법 위주로 제자를 가르친다고 했다. 시대가 변했다는 말이다. 자신이 무술을 배우던 시대는 정말 목숨걸고 한 수(手) 한 수 배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노사가 던진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하다.
“무인은 가능한 싸움을 피해야 하지만 한번 출수하면 상대를 반드시 제압해야 됩니다.”
본인은 그럴 자신이 있다고 했다. 단 조건을 달았다. 중국 무술에 한해서다. 한국이나 일본 무술은 논외라고 했다. 무림(武林)은 넓은 법이라면서.


■거합도 임현수 관장…검을 빼는 순간 상대는 베어진다 


시퍼렇게 날이 선 검이 칼집에서 3분의 1 가량 빠져나오는 순간 잠시 주춤거린다. 활인검(活人劍). 적에게 다시 한 번 무모한 결투를 중지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반 호흡의 멈춤 다음에는 그야말로 일사천리. 칼집을 빠져나온 칼은 그대로 적의 관자놀이를 베고, 연이어 상대의 머리를 양단한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시원하다. 고수는 칼이 아니라 몸으로 벤다고 했던가. 칼날 길이만 85㎝에 무게는 1.5㎏. 웬만큼 검을 다룬 이도 버거워 할 장도(長刀)를 그는 몸의 일부인 양 자유자재로 다룬다. 발검에서 착검까지 조금의 동요도 없다. 무쌍직전영신류(無雙直傳永信流) 거합도(居合道) 한국대표인 정기관 임현수(60) 관장이다.
“거합의 ‘居’는 모든 상황을 의미합니다. 앉아 있거나 걸어갈 때, 혹은 누워 있을 때 적의 갑작스런 공격에 대처하는 검법이지요.”
거합은 발도(拔刀)와 동시에 상대를 양단하는 다양한 기법과 격검(擊劍)을 연마하는 일본 고류 검술이다. 스포츠화한 죽도 검도와 달리 진검수련을 한다. 무쌍직전영신류는 50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일본 거합도의 본류이자 백미로 꼽히는 유파다.
임 관장은 합기도와 검도계의 살아 있는 역사다. 경남 거창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시절엔 당수(唐手)를 익히다가 1965년 영남대 재학시절 최용술 선생을 만나면서 평생 무도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고(故) 최용술 선생은 일본에서 유술(柔術)을 배워와 한국에 전파한 인물로, 한국 합기도계의 시조다. 그는 최 선생을 말년까지 모신 제자다.
최 선생에게서 혹독한 훈련을 받던 그는 어느 날 헌 책방에서 한 권의 무술책을 발견한다. 일본어로 된 낡은 검도 책이었는데 합기(合氣)라는 말이 눈에 띄었다. 대구 약전골목의 한 노인에게서 “합기란 칼과 칼이 마주쳐 상반되게 견주고 있는 힘의 상태”라는 해석을 듣는다. 그래서 검을 수련하면 합기도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검도에 입문한다. 1974년엔 정기관을 세워 검도와 합기도를 함께 가르쳤다. 정기관 검도부는 당시 유일한 사설 검도 도장이었고, 1000여명의 검사를 배출한 명문 도장으로 발돋움한다. 하지만 그는 죽도 검도에 만족할 수 없었다. 검도를 아무리 오래 해도 진검을 접할 수 없었고, 배우려고 해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일본에서 스승을 찾았다. 1982년 한 일본 무도잡지에서 일본 고전무도연맹 거합도 회장을 소개한 글을 본 것이다. 무쌍직전영신류 21대 종사(宗師) 세키구치 다카아키(關口高明) 선생이었다. 무작정 일본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답장이 온 것이다. 이후 그는 세키구치 선생에게서 20여년간 거합을 배우게 된다.
진검을 다루는 거합은 위험하다. 자칫 실수하면 자신을 벤다. 더구나 베는 상대는 가상의 적이다. 이 때문에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마음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에 수련에 몰입하게 되고 그 상태가 바로 참선이 된다. 가상의 적을 베면서 자신의 마음을 베는 것이다.
“거합에선 칼을 먼저 뽑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최대한 인내하는 것이죠. 하지만 일단 발도하면 반드시 베어야죠. 칼을 안 빼고도 상대를 제압하는 경지에 올라야 합니다. 결국 칼집 속에 모든 승부가 있습니다.”


■부드러움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윤익암 아이키도(合氣道) 한국 총본부도장 관장 


아이키도(合氣道) 한국 총본부도장 윤익암(尹翼岩·44) 관장은 거대한 바위다. 

둥근 얼굴에 둥근 몸. 당당한 체구에서 뿜어내는 기(氣)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의 몸짓은 절묘하다. 상대방의 팔을 잡고 억지로 비틀거나 꺾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자신의 몸을 가볍게 움직이는 것만으로 상대를 내동댕이친다. 그가 몸을 한 번씩 움직일 때마다, 팔을 한 번씩 휘저을 때마다 한 명씩 나가떨어진다.
“상대의 힘을 맞받아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역이용하는 것이죠. 이를 체술(體術)이라 합니다.”
그의 전공은 원래 격투기였다. 태권도장을 운영하던 부친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태권도를 익혔다. 꼬맹이 시절, 하루는 동네 친구와 싸움이 붙었는데 제대로 치고 때리지를 못했다. 이를 지켜본 부친께서 대노(大努)하였다. 정권으로 샌드백을 백 번 치는 벌을 주었다. 그런 고된 훈련 끝에 태권도 5단을 땄다. 태권도 외에도 많은 무술을 섭렵했다. 1984년에는 격투기 신인왕전에서 우승, 이듬해에는 격투기 전국 챔피언을 차지하였다. 그는 승승장구했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의 인생 행로를 바꾼 중대사건이 일어났다.
1988년 대만에서 열린 국제무술교류대회에 참가했을 때다. 대만 대표단으로 나온 이들은 대개가 노인들이었는데 무술 시범은 안보이고 빙글빙글 돌면서 넘어지고 쓰러지는 것을 반복하였다. 처음에는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다. 움직임을 자세히 보니 분명히 무술적 기법을 사용하여 상대를 제압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무술을 ‘아이키도’라고 했다. 한국의 합기도(合氣道)와는 너무나 달랐다.
오랜 고민 끝에 그는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이키도의 본고장인 일본에서 자신의 몸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만난 사람이 고바야시 야스오(小林保雄) 선생이다. 아이키도의 창시자인 우에시바 모리헤이(植芝盛平) 선생의 제자로서 아이키도 8단의 실력자였다. 마음씨 좋은 시골 할아버지 같은 분이 고수라는 것이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은 한국의 격투기 챔피언이 아니던가. 대련을 신청했다. 이리저리 온갖 힘을 짜내어 환갑 지난 노인네를 꺾으려고 하였지만 매번 내동댕이쳐지는 것은 90㎏ 거구였던 자신이었다. 이럴 수가. 하늘 위에 또 하늘이 있었다.
그때부터 10년 동안 서울과 일본을 오가며 아이키도를 배웠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지부를 여는 것을 승인받았다. 최근엔 현대 죽도 검도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유파인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와 일본에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고류 검술인 가토리 신토류(香取神道流)의 수련도 겸하고 있다. 일본 무술의 최고 비전이라고 일컫는 ‘아이키’도 익히고 있다.
“아이키도는 싸움 기술이 아닌 사랑의 무술입니다. 나를 해치려는 적도 껴안을 줄 아는 것이 아이키도의 정신이고 기술입니다.”
아이키도는 상대를 꺾고 조르는 관절기술이 장기다. 손가락이 하나라도 걸리면 손목 팔꿈치 어깨 척추 등 모든 부위를 연이어 꺾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키도는 살수(殺手)를 펼치지 않는다. 오직 끝없는 부드러움으로 상대를 제압할 뿐이다. 

 
[출처] [특집] 한국 무림의 고수들|작성자 눈이이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