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분노했던 난방비 0원.. "가슴 아픈 0원이 더 많았습니다"
국민일보 | 임지훈 기자 | 입력 2014.11.07 16:43
서울 노원구 중계3단지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김모(여·75)씨는 1년 내내 보일러를 틀지 않는다.
매달 20만원 정도 나오는 기초연금이 수입의 전부여서 월 임대료 3만4500원과 생활비를 대기도 빠듯하다.
1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8평 남짓한 집에서 혼자 지낸다.
장성한 아들이 있지만 공사장 인부로 일하고 있어 자기 살기도 벅차다.
김씨는 5년 전 갑상선에 문제가 생겨 수술을 받는 통에 일도 못하고 가진 돈도 모두 썼다.
곧 한파가 닥치겠지만 김씨의 난방 장비는 전기장판이 유일하다.
전기장판으로 겨울을 날 때 드는 전기요금은 월 1만원 남짓. 취약계층 전기료 지원제도가 있어 그렇다.
보일러를 틀었을 때 나올 난방비 10여만원과 비교하면 '보일러 없는 삶'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지난 겨울에도, 이번 겨울에도 김씨네 난방비는 계속 '0원'일 수밖에 없다.
독거노인 황모(80)씨는 서울 강서구 가양5단지 영구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가족으로 손자가 하나 있지만 연락이 끊긴 지 오래 됐다.
기초연금과 폐지 주워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황씨도 올해 보일러를 틀 계획이 없다.
보일러 대신 전기장판 온도를 최고로 올린 다음 이불을 돌돌 말고 잔다.
임대아파트를 관리하는 SH공사 측은 "황씨가 3년 전부터 치매 증세를 보이고 있지만
보일러 만큼은 실수로라도 트는 일은 없다"고 전했다.
황씨의 지난달 난방비도 0원이었다.
배우 김부선(53·여)씨의 폭로로 '아파트 난방비리'는 사회적 문제가 됐다.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합당한 이유 없이 공짜 난방을 누린다는 사실에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이에 SH공사는 임대아파트의 '난방비 0원' 3030가구를 조사했다.
그 결과 70.5%인 2135가구는 계량기가 멀쩡했는데 김씨와 황씨처럼 돈이 없어 정말 난방을 안 한 경우였다.
우리가 분노했던 난방비 0원의 이면에는 가슴 아픈 '0원'이 더 많았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새누리당 이노근 의원이 SH공사에서 받아 7일 공개한 자료를 보면,
지난해 10월부터 올 3월까지 6개월간 SH공사가 관리하는 임대아파트 14만3598가구(분양위탁 단지 제외) 중 3030가구(2.1%)의 난방비가 0원이었다.
이 가운데 2135가구는 전기장판·전열기 등 개별 난방기기를 사용하며 보일러를 전혀 틀지 않은 경우였다.
집에 사람이 없이 난방비 0원 사유를 확인할 수 없는 '부재 미확인'이 443가구,
고의로 고장 냈을 가능성이 있는 '계량기 결함'이 222가구다.
SH공사 주택관리팀 관계자는
"전수조사를 해보니 난방비 0원 가구의 상당수가 전기장판과 전열기로 난방을 대체하고 있다"며
"취약계층 전기료 지원 등을 감안하면 그게 상대적으로 저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입주민과 관리업체의 유착으로 난방비가 부과되지 않은 세대는 없었다.
10평 이하가 대부분인 영구임대아파트에서 입주자들은 방 1개를 전기장판으로 버티면서
난방기 밸브를 아예 잠그거나 난방온도를 가장 낮게 맞추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서울 노원구 대형마트에서 전기기구를 판매하는 김모(여·45)씨는
"이달 들어 날씨가 추워지면서 전열기를 찾는 사람이 하루에 10명 정도 오는데 대부분 노인들"이라며
"가스 난방비가 비싸다 보니 감당할 수 없어 전기장판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김부선씨의 폭로로 불거진 난방비리 수사는 지지부진하다.
서울 성동경찰서에 따르면 수사 대상인 16가구 가운데 극소수만 '난방비 0원' 사유를 입증했다.
나머지 가구는 한 달 이상 묵묵부답인 상태다.
성동구청은 김씨가 사는 아파트의 실태를 조사해
월 난방량이 '0'인 건수가 300건, 난방비가 9만원 이하인 건수가 2398건이라고 경찰에 통보했었다.
임지훈 기자 zeitgeis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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