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블랙리스트 파기환송'···무리한 직권남용 기소말라?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입력 : 2020.02.09 09:19 수정 : 2020.02.09 10:07
관심 사건들 대법원서 파기환송… 검찰과 법원·변호사·학계 의견 제각각
김명수 대법원장을 비롯해 대법관 13명이 1월 30일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상고심 판결을 앞두고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대법관석에 앉아 있다./권호욱 기자
법을 잘 모르는 일반인에게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를 쉽게 설명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는 다수설·소수설로 나눠 판단하려는 법학계에서조차 우위를 점한 학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만큼 모호하고, 해석의 여지가 많다는 얘기다.
대법원은 지난 1월 9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로 원심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안태근 전 법무부 감찰국장(54)에 대해 무죄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안태근 전 국장에 대한 파기환송의 핵심은 험지근무를 한 검사를 다음 인사에서 좀 더 나은 곳으로 발령내도록 한 ‘검사인사원칙집’은 정해진 원칙 또는 정해진 인사기준이 아니고, 따라서 험지근무를 한 서지현 검사를 또다시 험지에 발령내도록 인사담당 검사에게 지시한 것은 직권을 남용해 인사담당 검사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1981년 4월 13일 검찰인사위원회 제도를 만든 이래 40년 가까이 쌓아온 기준이 원칙이 될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단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도 “대법원이 정해진 결론을 만들기 위해 억지 판단을 했다”고 비판했다.
일선 판사들 “결국 대법원까지 가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 관련 사건을 맡고 있는 일선 재판부 역시 “우리가 어떤 식으로 판단해봤자 결국 대법원까지 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그도 그럴 것이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로 기소돼 언론의 관심을 받았던 모든 사건이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됐다. 1심, 2심까지 6명의 판사가 오랜 시간 기록을 검토하고 내린 판단도 번번이 대법원에서 깨진 셈이다. 법원 내부에서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에 대한 대법원의 명확한 기준이 세워지지 않겠느냐”는 예측이 흘러나왔다. 대법원장을 비롯해 대법관 전원이 판단하는 전원합의체 판결은 대법원의 각 소부에서 내리는 판단보다 더 큰 영향력을 가진다. 법조계 안팎의 예상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1월 30일 박근혜 정부 시절 특정 문화·예술계 인사를 지원 대상에서 배제한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직권남용 등의 혐의로 기소돼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징역 2년을 선고받은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7명에 대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면서 직권남용죄의 성립 요건을 정리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직권남용죄의 요건 중 ‘상급자의 직권남용 행위’와 ‘하급자의 의무 없는 일 수행’은 별개의 구성요건으로 각각을 따져 두 요건이 모두 충족해야만 직권남용죄가 성립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어려운 말이지만 1단계로 ‘상급자의 직권남용행위’가 요건을 충족하고, 2단계로 하급자의 ‘의무 없는 일을 한 때’가 모두 해당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라는 결과가 발생해야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령 상급자가 직권을 남용해 지시했더라도 하급자가 해야 할 업무의 범위 내에 있는 일이라면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로 처벌할 수 없다는 얘기다. 반대로 상급자의 지시가 직무범위 밖의 ‘월권행위’라면 설령 불법이라도 1단계인 직권남용행위가 없기 때문에 2단계로 나아갈 수 없어 직권남용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결론도 가능하다. 적어도 이 두 가지 요건 확립만으로도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이 현재 재판을 받고 있는 사법행정권남용 사건 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일방이 상대방의 요청을 청취하고자 자신의 의견을 밝히거나 협조하는 등 요청에 응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공무원이) 법령 등에 따라 직무수행 과정에서 준수해야 할 원칙이나 기준, 절차 등을 위반하지 않는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한마디로 공무원의 업무수행 범위는 그들이 자율적·능동적으로 할 수 있도록 범위를 넓게 봐야 하고, 그 과정에 명백한 불법이 발견되지 않는 한 일련의 행동을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의 ‘결과(기수)’가 발생하지 않고, 지시행위와 이에 따른 일련의 행위가 단순한 행정검토 수준에 머물렀다면(미수), 업무처리 중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를 의심할 만한 행위가 있었더라도 ‘과정’은 처벌할 수 없음을 명확히 했다. 우리 형법은 ‘기수범’과 ‘미수범’을 엄격히 구별한다.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는 기수에 한해 처벌한다는 점을 대법원은 다시금 확인한 셈이다.
“수사기관이 유·무죄 판단 말라는 경고”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판결문을 뒤늦게 살펴봤는데 마지막 장까지 읽고 머리를 스친 단어가 ‘무죄’였다. 그분(대법관)들의 생각이야 내가 알 수 없고, 그분들이 사법행정권남용 사건에 어떤 결론을 내리기 위해 이런 판결을 했다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현재까지 대법원이 세운 논리 전개대로라면 현재의 사법농단 사건 피고인들 대부분은 무죄일 수밖에 없지 않나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2018년 4월 10일 서울 광화문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 소회의실에서 열린 박근혜 정부 한-불 수교행사 블랙리스트 사건 조사결과 브리핑에서 진상조사위가 9473명의 시국선언 명단을 공개하고 있다./김기남 기자
“법원행정처 기조실 심의관들이나 사법정책실 심의관들이 늘상 하는 일이 실장이 ‘이러이러한 것 알아봐라’, ‘이러이러한 것 아이디어 좀 내보라’고 하면 시키는 대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었다. 이 업무는 법원행정처에 판사들이 들어온 이래 관행적으로 늘 해오던 일이다. 또 일선 재판부의 동향을 알아보라고 하고 보고서를 작성하게 하는 일이 결과적으로 판결에 영향을 줬는지에 대한 검찰의 명확한 입증이 없다. 관행이 잘못됐다는 비판은 가능하지만 죄가 되지는 않는다는 결론이 내려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같다.”
다른 수도권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유재수 감찰중단 역시 재량의 범위 내에 있고, 과거에도 그와 유사한 사례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면 무죄가 가능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전직 고위 법관 출신 변호사는 “공무원이 하는 업무가 정도를 벗어날 정도로 불법적이고 초헌법적인 수준의 문제가 있는 게 아닌 한 수사기관이 나서서 유·무죄 판단을 하려 들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도 담겨 있다”고 했다.
대법원이 내놓을 수 있는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판단의 A~Z는 이제 나올 만큼 나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검찰과 법원, 변호사, 학계의 의견은 제각각이다. 검찰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기환송 기사가 보도된 직후 “기존의 법원 입장과 달라진 게 없고, 사법농단이나 감찰무마 등은 이번 판결에 따르더라도 무죄라는 결과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가이드라인을 줘도 의견이 제각각인 이유는 한 가지다. 여전히 해석은 각자의 몫이라는 점이다. ‘의무 없는 일’은 도대체 무엇인지, ‘남용’의 범위는 어디까지인지를 밝혀내고 방어하는 것은 검찰의 역량이자 변호인의 능력이다. 문제는 개별 사안에 대한 판단도 여전히 재판부마다 다를 수 있다는 데 있다. 방금 딴 사과 한 알을 놓고 누군가는 덜 익은 사과로, 누군가는 잘 익은 사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재판부는 마무리 의견으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죄가 과잉 적용될 경우에는 직권남용이 될 수 있음을 우려하여 창의적·개혁적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위축시키게 되어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는 어쩌면 검찰과 재판부에 대한 대법원의 경고일지도 모른다.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2090919001&code=940100&utm_campaign=daum_news&utm_source=daum&utm_medium=related_news#csidx3e94fcf631891d9b6545ccf6fd7232a
'세상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미애, 수사-기소검사 분리 추진.."책임은 누가 지나" 반발 (0) | 2020.02.11 |
---|---|
검찰 내분 악화일로..윤석열, '갈등봉합' 메시지 내놓나 (0) | 2020.02.11 |
중앙지검 신임 차장검사 내일 첫 출근..공소유지 주력 전망 (0) | 2020.02.02 |
추미애 "수많은 민생사건 캐비닛에 쌓여"..檢 직제개편안 공포 (0) | 2020.01.21 |
검찰 중간간부 인사 23일 단행…"관행 벗어나되 수사도 고려"(종합) (0) | 2020.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