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취업 낭인 "평범하게 살기가 젤 어렵네요"
한겨레 | 입력 2014.11.23. 15:50 | 수정 2014.11.23. 22:20
[한겨레][경제의 창] '취준생'을 면접하다
2014년 취업준비생들의 고뇌
대기업이란 '로또'를 찾아서
청년들의 취업이 하늘의 별 따기다.
1997년 말의 외환위기 전, 대기업 선배가 찾아와 '우리 회사로 오라'며 즉석 채용을 했다는
한 대기업 관계자의 추억담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얘기다.
온갖 스펙으로 중무장한 '일등' 취업준비생이 널렸지만 설 자리는 한정돼 있다.
적자생존의 경쟁에서 밀린 취준생들은 갈 곳이 없다.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은 옛말이고, '인구론'(인문계 출신의 9할이 논다)이란 말도 생겨났다.
취업률 숫자에만 귀를 쫑긋하는 정부는 뒷짐을 지고 있고,
기업은 '인재를 뽑겠다'며 춤추듯 채용 방식을 바꾼다.
2014년 취준생들의 고민과 채용 방식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 지친 그대, 잠시 짐을 내려놓다
유연석(가명·25)씨는 대학 5학년이다. 8학기를 남겨두고 휴학중이다. 이번이 세번째 휴학이다.
졸업이 취업을 보장하지 않고, 기업은 졸업예정자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학교 담장은 울타리이기도 하지만 넘어야 할 벽이기도 하다.
유씨는 요즘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하필 취업포털에 채용공고를 올리는 일이다.
그는 입사지원서를 쓰지 않고 있다. 그는 대학생인 듯 대학생이 아닌 듯 경계에 놓여 있다.
그는 "채용공고만 봐도 울렁거렸다. 지쳤다. '그래, 아무것도 하지 말고 한번 쉬자'고 휴학했다.
그런데 뒤처진다는 생각에 불안하다"고 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지만 당사자에겐 그냥 아픔일 뿐이다.
유씨는 ㅇ대 국어국문학과에 2008년 입학했다.
그는 지난해 상반기 첫 휴학을 하고 한 주간 잡지사에서 여덟달 동안 인턴으로 온라인 마케팅 일을 했다.
지난해 하반기 복학해 7학기를 마친 그는 올해 초 다시 휴학하고 석달 동안 ㅇ사에서 인턴을 했다.
정규직 전환 조건이었지만 그는 '나쁜 기억'만 안고 나왔다.
그는 구직자의 절박함을 이용한 회사의 '갑' 행세가 도를 넘었다고 했다.
급여는 최저임금에 못 미쳤고, 집에 못 가는 날도 있었다. 사무실은 회사 옥상의 옥탑방이었다.
그는 "출퇴근 시간이 길어 회사 근처에서 고시원을 얻었던 여자 동료는 스트레스 때문에
원형탈모증이 생겼다.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 한 남자 동료에겐 회사 쪽에서 '살 빼고 오라'는 전자우편을 보내기도 했다"고 말했다.
서류통과도 하늘의 별 따기, 채용공고만 봐도 울렁
구직자 절박함 악용한 '인턴 착취' 경험
스펙 지운 '직무평가'가 진정한 스펙초월 채용
대기업 졸업예정자 우대, 최근 졸업유예는 기본
취업 '재수' '삼수' 몰려 체감 경쟁률 높아
정부, 중소·중견기업 잡포스팅 시스템 제공 필요
하루 10시간 넘게 입사 지원서 작성 '취업기계'
중소기업, 서류전형 탈락 발표·통보도 안해 상처
정규직 전환 인턴, 직무만족도 떨어져 취업연장선
그는 최종 면접을 포기하고 그만둔 결정이 지금 후회되기도 한다고 했다.
올해 상반기 20여곳에 입사지원서를 냈으나 한곳을 빼고 서류전형에서 떨어졌다.
그는 서류전형 통과 '타율'이 1할이면 운이 좋다고 했다.
인문계 출신은 지원할 직무가 마땅치 않아 더 힘들다고 한다.
그는 "대기업 경쟁률은 사실 무의미하다. 되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라는 심정으로 다 지원한다.
로또와 같다"고 말했다.
취준생 사이에선 '합격용 자기소개서'가 돈다고 한다.
한건당 20만원에 자소서를 써주는 컨설팅업체도 있다.
스펙 초월 채용 확대로 자소서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나타난 편법이다.
유씨는 스펙 초월 채용에 부정적이다.
'스펙초월' 자체가 '스펙'이라는 얘기다. 그는 "학점, 토익 점수 따는 취준생들이 무슨 스토리가 있겠나.
스토리를 만들려고 아프리카 가서 사진기사 하고 남미에서 장사한다.
스펙을 싹 지우고 직무평가로 판단하는 게 스펙 초월이다.
지금은 자신의 역량을 알릴 기회조차 얻기 힘들다"고 말했다.
유씨는 내년 2월 한달 동안 유럽 여행을 떠난다.
그는 취업을 위한 '스토리 여행'인지, 구직활동으로 지친 심신을 달랠 '힐링 여행'인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그는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평범하게 살기가 가장 어렵다"고 했다.
■ 대기업이란 로또를 찾아서
"면접비로 받은 3만원은 어제저녁에 바로 술 먹는 데 썼다. 면접관의 질문에 순간 영혼이 빠져나갔다.
다음 면접 준비하려면 빨리 잊어야 한다." 지난 5일 만난 조윤진(가명·25·여)씨는 전날 대기업 면접을 봤다. 어렵게 찾아온 기회를 허공에 날렸다는 생각에 허탈감이 컸다.
조씨는 "올해 하반기가 마지막 기회라 다 넣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8월 ㅅ여대 경영학과를 코스모스 졸업한 조씨는 현재 '백수'다.
조씨의 졸업도 간단하게 설명되진 않는다.
휴학·복학을 반복하다 지난해 상반기 8학기를 마쳤지만 졸업을 유예했다.
그는 "대기업은 졸업예정자를 뽑기 때문에 졸업을 일년 늦췄다. 졸업유예는 거의 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일년 동안 쉬지 않고 입사지원서만 냈다.
그는 "졸업 전엔 괜찮았는데 지금은 소속감이 없다는 상실감으로 스트레스가 심하다"고 말했다.
조씨는 1남2녀 중 장녀다.
경제적 부담감, 집안의 기대는 그의 선택지를 '대기업'으로 좁혀놨다.
언론에선 올해 하반기 대기업 채용 규모가 늘었다고 하지만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한다.
그는 "상반기에 '재수'한 취준생들이 하반기에 몰리기 때문에 체감 경쟁률은 더 높다"고 했다.
올해 하반기 '재수', '삼수'를 한 취준생은 또다시 내년 상반기 채용시장으로 내몰려 병목현상은 가중된다.
조씨는 지난해 상반기부터 반기별로 30여곳에 입사지원서를 넣고 있다.
그의 스펙은 토익 880점, 토익스피킹은 레벨6. 채권추심 업무까지 했던 공기업 인턴,
대기업 마케팅 공모전 우수상, 국내외 대외활동 경험도 쌓았다.
그는 서류전형 통과는 30곳 중에 3곳 정도라고 했다.
그는 "대기업이 채용 원칙을 명확하게 했으면 좋겠다. 스
펙을 볼 거면 솔직히 명시하고, 스펙 초월을 한다면 아예 스펙을 보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기업 취직을 바라는 조씨의 꿈은 올해를 넘기면 꿈으로 남는다.
주요 대기업은 신입 지원 자격에 졸업예정자라는 토를 단다. 졸업자는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면 조씨도 조금 규모가 작은 기업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는 '잡포스팅'(일자리 공시)이 너무 부족하다고 했다.
그는 "취업포털이나 학교 취업지원실은 대기업만 다룬다.
취준생들로선 눈에 보이는 100대 기업만 지원하게 된다.
정부에서 정책적으로 중견·중소기업들 구인정보 노출을 늘리고, 해당 기업이 어떤 일을 하는지,
직무는 무엇인지 설명해주면 취준생들의 선택폭이 넓어진다"고 말했다.
■ 끝나지 않는 구직활동
지난 6일 저녁 서울 당산역 한 설렁탕집. 뚝배기에 담긴 설렁탕을 후후 불자 뜨끈한 김이
성나정(가명·25·여)씨 얼굴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성씨는 온종일 바깥에 서서 일을 한 뒤였다.
수원 집까지 2시간의 퇴근길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는 오늘 일에 뿌듯한 듯 설렁탕 한 그릇을 맛있게 비웠다. 성씨는 "인터뷰하다 눈물 나올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성씨는 지난해 8월 ㄱ대 국어국문학과를 7학기 만에 조기 졸업했다.
그는 2012년 두 학기를 휴학하고 1년 동안 대기업에서 봉사활동을 했고 '나홀로' 인도 여행,
유럽 여행도 다녀왔다. 그는 애초 대기업보단 엔지오(NGO·비정부기구) 홍보팀 업무를 바랐다.
졸업 학기 때만 해도 그는 자신있었다.
그런데 좀처럼 취업문이 열리지 않자, 스펙을 보강하려고 지난해 9월 필리핀과 몰타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올해 4월 귀국했다. 성씨는 "이때부터 고통이 시작됐다"고 했다.
성씨의 일과는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됐다.
오전 8시 아침식사 뒤 가족들이 나가면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10시간 동안 입사지원서를 썼다.
머리를 식힐 겸 1시간 운동하고 나면 다시 밤 11시부터 새벽 2~3시까지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는 "마치 취업기계 같았다. 말수도 줄고 방에 처박혀 있으니 부모님이 많이 걱정했다"고 말했다.
취업한 친구들의 사회관계망서비스에 근무지가 '대학교'가 아닌 '○○기업'으로 바뀌면 상실감은 더욱 커졌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는 취업한 친구들이 존경스러웠다"고 말했다.
자존감이 떨어진 취준생에겐 생채기도 큰 상처가 된다.
성씨는 한 중소기업에 서류 접수를 하며 '될 것 같다'는 좋은 느낌을 받았다.
기대는 그만큼 커졌다. 그런데 시간이 꽤 지나도 서류전형 결과를 알 수 없었다.
사쪽이 서류전형 합격자에게만 개별 통보를 했던 것이다.
그는 "모멸감을 느꼈다. 주위 친구들도 대부분 이런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성씨는 지난 10월 중순 국내 한 엔지오에 정규직 전환 조건으로 인턴에 채용됐다.
어딘가에 소속돼 있다는 건 위로가 되지만 취업활동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에 고민이 많다.
합격 소식을 들은 뒤 그는 솔직히 기쁘지 않았다고 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직무 분야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하는 일은 취업의 연장선 같다. 며칠 전 '계속 다닐 거 아니지'라는 어머니 말을 듣고
속상해 울었다. 이제 또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머리가 복잡하다"고 말했다.
김정필 기자fermat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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