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공스님
이 시대의 대 도인이셨던 탄공선사께서는
1881년(불기 2425년) 음력 10월7일에
당시 경북 상주군 내서면 가막골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유복자로 태어나신 탄공선사께서는
어머님 역시 생후 두달 만에 별세하시고
당시 상주 군수이셨던 조부의 슬하에서 성장하십니다.
조부께서는 5대독자로 탄생하신 손자가 너무나 영특한지라 사랑을 듬뿍 주시면서도
부모없는 손자를 늘 마음 아파했습니다.
조부께서는 재력도 상당했습니다.
어린 손자를 논밭과 함께 친척에게 의탁하려고도 생각했으나
조부께서 세상을 하직하신 후
사람들의 탐욕심으로
행여나 재산만 차지하고 어린 손자를 홀대 할까 염려도 되고 어린 손자를 사랑함이 남달라
애틋한 마음을 달래며 주왕산 대전사로 출가시키게 됩니다.
조부께서는 당시 조부 소유였던 주왕산과 논 수십 마지기를 대전사 부처님께 시주하였습니다.
그때가 탄공선사 4살때인 1884년이었습니다.
5년후 1889년 9세때
사미승으로 호명당(진호명)선사로부터 탄공(呑空)이란 불명으로 수계를 받게 됩니다.
깊은 주왕산 골짜기에서 불법을 공부하시다가
11살 때 처음으로 개천에서 빨래하는 여인네를 멀리서 보게 됩니다.
탄공선사께서는 여인의 모습을 그때 처음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멀리서 여인의 모습을 처음 본지라
은사 스님이셨던 호명당 선사께
“ 저기 개천에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 라고 여쭈었더니,
스승께서 하신 말씀이
“ 이 놈아 그것은 사람이 아니고 반거충이야. 자 어서 가자.”
라고 하시면서 탄공선사의 팔을 잡고는 빠른 걸음으로 대전사로 오셨답니다.
호명당 선사께서는
탄공선사의 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빨래하는 여인을 반거충이라 하면서 그런 것들에 관심을 절대 두지말라 했습니다.
탄공선사께서는 19세때 조선 황실에서 실시하는 조선 화공백일장(현재 국전의 전신)에서
장원을 함으로써
당시 고종황제로부터 자질을 극찬 받고
진사를 제수(除授)받았으나 이를 고사했습니다.
그 후 19세에서 29세까지 백양사에서
근대의 큰스님이셨던 송만암, 송만공, 성철스님의 은사이신 하동산 스님과 함께
10여 년간 용맹 정진하였습니다.
1908년 27세때 5개월간 해인사 주지를 지내셨습니다.
1913년부터 지금은 대구직할시 소재 용연사(당시 달성군 옥포 소재)에서
3년간 수도하시면서
노태우 전대통령 부친과 10.26을 정확히 예언한, 국내 명리학 제1인자였던 도계(陶溪)박재완 선생을
지도하고 가르쳤습니다.
1919년에 경북 의성군 소재 고운사로 옮겨 수도 정진중 3 ・1운동이 일어나자
왜경들이 우리 동포들을 잔인하게 구타하고,
당시 17 ・8세 되던 어린 부녀자를 강제로 능욕하려는 현장을 목격하자
의분을 참지 못해 왜경을 응징한 후 그 길로 금강산으로 입산하십니다.
당시 조선 사람이 왜경을 응징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으니
대선사님의 남다른 용기와 민족애를 엿볼 수 있습니다.
금강산 유점사로 입산했으나 왜경들의 체포 감시가 심해
유점사에서 약 50리 위에 위치한 동우굴에서 수도정진 하였습니다.
1931년에 중국 소림사에서 6개월간 수행하시다가
그 다음 해 1월 8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홍구 공원 의거사건을 전후하여
상해임시정부 지하 사무실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서
대선사님께서 직접 마련한 독립자금을 전달했습니다.
당시 김구 선생께서는 대선사님보다 5살 연상인데도 대선사님의 애국심에 감탄하여
“ 탄공스님의 조국애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 라고 정중히 합장하며 말씀했다 합니다.
그 후, 귀국하여 다시 금강산 동우굴에서 수행 정진중 민족해방을 맞이했습니다.
1945년에 해방과 더불어 금강산을 떠나 월남하여
지리산, 속리산, 설악산, 팔공산, 태백산, 소백산, 월출산, 덕유산, 도장산과
전국 각지의 사찰을 순례하며 수도 정진했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3달 전에
당시 수원경찰서장이던 노 전대통령 장인에게
사표를 내게 하고는
이유를 몰랐던 노 전대통령 장인인 김 거사는 후일 6・25 전쟁이 일어나자
그때에서야 자신의 생명을 살리고자 그랬던 것을 알고는
대선사님의 높으신 도력에 새삼 놀랐다고 했습니다.
1953년에 경북 학가산에서
전설적인 대도인이시며 182세로 지리산에서 입적하신 개운조사님을 만나게 됩니다.
개운조사님께서 대선사님은
“후일 100세 상수(上壽)할 터이니 100살이 되면
벽사서화(辟邪書畵)로 중생들에게 보시하라”고 하셨답니다.
그 후 지리산, 태백산, 소백산, 내설악, 팔공산, 도장산 등에서
국태민안 기도하시며 참선 수행 정진 하였습니다.
1986년 충북 청원군 남이면 척산리 탄공정사에 주석하시면서
인연있는 대중들을 포교하였습니다.
태국 승왕(僧王)의 초청으로 태국을 방문하여
태국불교의 국빈으로 양국 불교문화발전에 기여했습니다.
-4- 그동안 각 언론에서 특별 인터뷰 요청이 수차례 있었으나 한번도 인터뷰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한번만 인터뷰하시면 어떠시냐고 여쭈면 대선사님께서는
“ 중은 원래 조용히 지내다가 가는 것이야 ” 하시면서 거절하셨습니다.
축지를 하시면서 대 도력을 보이셨던 대선사님께서는
1998년(불기2542년) 5월 23일 속리산행을 마지막으로 하시고는
그 다음날 저녁 평상시와 다름없이 상좌스님과 신도 몇 분 과 담소하시며 지내시다
밤 11시에 모두 각 방으로 물러가게 하시고,
5월 25일 자시(子時,0시 30분경)에 좌탈(坐脫)로 적정 열반하셨습니다.
열반 후에도 숨을 거두면 몇 시간 안에 누구나 시반(屍班:시신의 반점)이 나타나는데
대선사님은 3일 동안 살아있는 사람처럼 전혀 피부가 변하지 않고 시반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시신 특유의 냄새도 나지 않아 입관도 3일 후에 했습니다
대선사님께서는 이 땅의 유일하신 벽사도인이셨습니다.
대선사님을 가까이 모셔온 후생 중 한사람으로서,
淺學非才하나 在世하실 때 직접 법문하신 내용과 대선사님께서 직접 기록하신 약력을 바탕으로
간략한 행장을 기술했습니다
비전(秘傳)된 바에 의하면, 118세로 좌탈 당시의 모습이라고 한다 예전에 잠시 이런분이 계셨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적 있지만 잘은 몰랐는데 어제 문득 티비에 나온것을 보고 궁금해서 더 많은 자료를 찾아 보았다 돌아가시기 바로 전까지 제자들과 담소하고 춤까지 추셨다고 한다 그때 동동주를 다섯병이나 드셨고 춤은 학춤을 추셨다는데 그 학춤은 자고로 신선이 세상을 떠날때 추는것 이라고 한다 생전에 곡차를 아무리 많이 드셔도 결코 냄새가 나거나 취하는법이 없었다고 하는데 어떤때는 맥주를 120병이나 드셨다고 했다 조선조 진묵스님의 일화가 생각나게 하는 현대의 도인이신것 같다 사람들과 마지막 대화를 하고 모두 물러가라고 한뒤 12시 경에 찾아와 보니 저렇게 돌아 가셨더란다 기존의 어느 종단에도 소속돼 있지 않으셨고 어느 매체의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아 평소에는 아무 이름없이 조용히 계셨는데 열반에 드신 후에야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고 한다.
100세 이상된 도인(道人)이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정해진 일시에 하늘에 고천(告天)을 올리고난 후에
쓰고 그린 성스러운 작품(作品)으로
사기(邪氣)를 물리치는
영험스러운 서화작품을 말합니다.
탄공선사께서는 재세시 말씀하시기를,
“육경신을 성취한 백세넘은 도인이
붓으로 ‘ㄱ'자 하나라도 그린 것을 집안에 걸어놓으면
집안에 사기가 요동을 못해......."라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이세상에서
백년넘게 살며 육경신을 성취한 도인의 글과 그림은
자연적으로 집안에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의 기능을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리고 탄공선사께서는
벽사서화 석점을 함께 소장하면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벽사서화를 소장하게 되면,
사기(邪氣)를 물리쳐서 길상개운(吉祥開運) 되므로
사업자는 사업이 번창하고,
좋은 원력을 순조로이 성취하며
환자는 병마(病魔)에서 속히 쾌차되어 수명을 연장시킵니다.
118세로 좌탈열반하신
탄공대선사님의 벽사서화는
소장한 자의 허기(虛氣)를 벽사보기(辟邪補氣)해 주는 성스러운 작품(作品)입니다.
탄공대선사님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벽사서화를 남기신 벽사도인이십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벽사서를 벽사문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현재 사전의 설명문은 잘못 기술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도인 강태공 선생이 주(周)나라 문왕의 국사(國師)로 있을 때
하루는 문왕이 姜공에게
“姜공! 오늘은 짐과 백성을 위해 벽사서를 써 주게.” 라고 말했으나,
姜공은 아뢰기를
“폐하, 대단히 죄송하옵니다. 제가 벽사서를 쓸 수는 있으나 지금은 때가 아니라 써서 올릴 수가 없습니다.”
라고 문왕에게 말했습니다. 문왕이 벽사서를 쓸 수 없는 이유를 묻자,
姜공이 정중하게 아뢰기를
“폐하, 제 나이 아직 97세밖에 되지 않아 쓸 수가 없습니다.
제가 지금 벽사서를 쓰면 하늘의 도리를 거스르는 천역(天逆)하는 일이 됩니다.
폐하, 벽사서라는 것은
100세가 넘은 도인이 정해진 일시에 하늘에 고천(告天)을 하고 쓰는 것이오니,
3년만 기다려 주십시오” 라고 아뢰면서 姜태공 도인은 당시 벽사서를 문왕에게 써올리지 못하고,
3년후에 벽사서를 문왕에게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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