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주 몽골 대사관 직원들은 왜 '깐풍기'를 폭로했나
입력 2019.06.01. 05:06
정재남 대사의 도 넘은 행태에
불안 심해지고 '방어용 녹음' 일상화
견디다 못한 직원들 똘똘 뭉쳐 폭로
정 대사는 "원칙에 따른 것" 반박
‘깐풍기 대첩’으로 대표되는 정재남 주 몽골 대사의 갑질 의혹(<한겨레> 5월28일 먹다남은 깐풍기 어쨌는지 모른다고…주몽골 대사의 ‘갑질’, 5월29일 출력 안해줬다고 “적성 맞는 곳 가라”…‘깐풍기 대사’ 갑질 백태)은 ‘해프닝’으로 끝나고 마는 걸까. 의혹을 받는 당사자인 정 대사는 언론 인터뷰를 통해 ‘원칙과 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나를 직원들과 일부 교민들이 조직적으로 음해하려는 것’이라며 논란의 책임을 직원들에게 떠넘기는 모양새다. 직원들이 요청한 감사에 외교부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지만, 직원들은 ‘자칫 경징계로 끝나면 문제를 제기한 우리가 더 힘들어질 수 있다’며 감사가 솜방망이 처벌로 끝나지 않을까 두려움에 떨고 있다.
주 몽골 대사관 직원들이 두려워하는 이유
직원들이 문제제기를 해놓고도 두려워하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우선 이번 폭로가 나오게 된 과정부터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폭로는 용감한 내부고발자 한 명이 자신에게 닥칠 위협이나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면서 이뤄진다. 그러고 나면 관련자들은 이 사람의 뜻에 공감하면서도 자신도 다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고 만다.
그런데 주 몽골 대사관은 좀 달랐다. 정 대사의 행태를 견디다 못한 행정직원들이 지난 3월 전국노동평등노동조합 재외공관 행정직지부(노조)에 집단으로 가입해, 정 대사가 부임한 지난해 5월 이후 대사관에서 벌어진 일들을 상세히 알렸다. 직원 ㄱ씨는 “행정직원 조합원 전원일치 의견으로 노조에 상담을 요청했다. 불이익을 받게 될까 걱정되는 건 사실이지만, 부당함은 알려야 된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게 됐다”고 말했다. 외교부 소속 직원과 다른 정부부처에서 파견 나간 직원들도 증언을 보탰다. 부처 내 평판이나 승진 등이 달려 있는 이들로썬 다소 이례적인 일이다. ‘오죽 심했으면 직원들이 똘똘 뭉쳐 나서게 됐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깐풍기 대첩’은 ‘오죽 심했으면’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사실 갑질은 그 속성상, 뭔가 거창한 사건이나 계기로 생기는 일이 아니다. ‘땅콩 회항’은 한낱 마카다미아 한 봉지 때문에 벌어졌고, 이 소동을 일으킨 주인공의 어머니는 고작 생강을 충분히 사놓지 않았다며 직원을 무릎 꿇리고 책을 집어던졌다. ‘사소한 것 하나까지 내 마음에 들게 하라’는 갑의 지배욕은, ‘내가 이런 것까지 야단맞고 욕을 들어야 하는가’라는 을의 수치심을 이끌어낸다. 이런 일을 반복적으로 당하는 사람은 자존감까지 무너지게 된다.
직원 ㄴ씨는 “너무 말도 안 되는 일로 폭언을 계속 듣다보니, 어느 날은 내가 구더기처럼 느껴졌다. 여기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 뛰쳐나갔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횡단보도 끝에 주저앉아서 울고 있더라. 근처를 지나던 차량 운전자가 나를 발견하고는 내려서 인도 쪽으로 부축해주면서 집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직원 ㄷ씨는 “툭하면 꾸중 듣고 큰 소리가 나니, 내가 혼나는 게 아닐 때도 마치 내가 혼나는 것처럼 불안했다. 회의 때도 대사님이 원하는 대답이 안 나오면, 그 대답이 나올 때까지 ‘왜 제대로 보고를 안했느냐’며 화를 내거나 ‘더 검토해보고 오라’는 식으로 십여 차례씩 회의를 거듭하니 견디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깐풍기 대첩’의 녹음 파일이 존재하는 것도 정 대사의 이런 스타일 ‘덕분’이다. 여러 직원들의 공통된 이야기는 이렇다. “정 대사가 사사건건 책임 소재를 가리고, 지시 내용을 수시로 바꾸니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때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았냐’고 하도 다그치니까, 녹음을 하거나 받아쓸 수밖에 없었다. 지시를 제대로 이행하려는 거였지만, 나중엔 대사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녹음을 해야만 했다.” 정 대사가 총영사로 있었던 전임지에서도 행적직원 여러 명이 그의 이런 스타일을 견디지 못해 그만뒀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이와 관련해 정 대사는 “갑질을 비난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기관장들이 위축된 게 사실이지만, 나는 원칙에 따라 잘못한 게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징계가 있어야 된다고 믿는다. 그래서 공관에 힘든 상황이 있었는데, 직원들이 그런 분위기에 반발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고려-몽골 형제맹약 기념 행사?
직원들이 제기하는 문제는 또 있다. 주 몽골 대사관은 7월4~5일 ‘고려-몽골 형제맹약 800주년 기념학술회’를 몽골국립대, 동북아역사재단 등과 함께 열 예정이다. ‘여-몽 형제맹약’은 고려와 몽골이 강동성 전투에서 거란족을 물리친 뒤 맺은 것으로 원나라와 군신관계로 이어진 굴욕적인 역사라는 평가와, 그 당시로 보면 대등한 외교관계였다는 정반대의 해석이 모두 존재한다. 직원들은 합치된 평가가 내려지지도 않은 일을 왜 대사관이 예산을 들여 기념해야 하냐고 지적한다. 직원들은 지난해 11월 정 대사가 몽골의 한 대학 강연을 준비할 때도 그의 역사인식에 의문이 들게 하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고려 여성들이 원나라로 이주해, 한국과 몽골의 뿌리가 같아졌다’며 공녀를 언급하는 대목이 원고에 있었다는 것이다. 직원들의 문제제기로 실제 강연에서 이 내용은 빠졌다.
지난 4월18일 정재남 주 몽골 한국 대사가 몽골 후레대에서 ’고려-몽골 형제맹약 800주년’ 특강을 하고 있다. 주 몽골 한국대사관 누리집 갈무리이미지 크게 보기
지난 4월18일 정재남 주 몽골 한국 대사가 몽골 후레대에서 ’고려-몽골 형제맹약 800주년’ 특강을 하고 있다. 주 몽골 한국대사관 누리집 갈무리
이에 정 대사는 “형제맹약은 그 당시 칭기즈칸의 지시로 맺은 대등한 군사동맹이다. 몽골 국민들은 과거에 한국과 이런 아름다운 역사를 가진 것에 큰 호감을 갖고 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이런 부분을 발굴해 또 다른 800년 동안 우호협력을 다지자는 차원에서 하는 행사가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했다. 또 “고려 시대에 몽골에 가 거주한 고려 여성이 20만명 정도 되는데 대개 몽골인과 결혼해, 혈연적으로 많이 섞였다는 건 역사적이고 학술적인 사실이다. 그걸 언급하는 게 무슨 문제가 되느냐”고 반박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행사는 아직 확정된 게 아니고, 본부와 조율해 지시를 따라야 한다”라며 “역사적으로 논란이 되고 민감한 부분이 있으므로 행사가 적절한지, 제목이나 내용은 어떤지 등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종합적인 의견을 대사관에 전달하겠다”고 말했다.
재외공관장의 갑질 논란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관노비’ 논란까지 있었지만, 공관장이 ‘제왕’으로 군림한다는 이야기는 여전히 끊이지 않는다. 사회적인 감시의 눈길이 덜한 탓도 있겠지만, 외교부의 ‘제 식구 감싸기’와 공관장들의 행정직원 하대 분위기 탓도 크다는 게 노조의 판단이다. 노조 쪽은 “이번에야말로 제기된 의혹을 철저히 감사해 확실히 징계해야 한다. 또한, 공관장들이 행정직원들을 존중하고 같은 직원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행정직원들의 처우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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