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법원 "황혼 이혼 대신 卒婚은 어떠세요?"
박상기 기자 입력 2017.10.09. 03:09 수정 2017.10.09. 07:22
[사생활 보장에 배우자 연금수령 이점.. 이혼조정 새 해법 인기]
'방 따로, 밥 각자 해결' 등 합의
부부관계 회복 부담 거의 없어 이혼 반대하는 자녀들도 수긍
부부가 먼저 법원에 요청하기도.. 일부선 "말장난·미봉책에 불과"
내후년이 결혼 50주년인 박모(72)씨는 올해 초 서울가정법원에 남편 최모(76)씨를 상대로 이혼조정을 신청했다. 박씨는 "남들은 내가 행복하게 살았다고 생각하겠지만 남편의 이기적인 행동과 간섭 때문에 늘 불행했다. 이혼하게 해 달라"고 했다.
대학교수를 지낸 남편은 "내 생에 이혼은 없다"고 펄쩍 뛰었다. 자식 삼남매도 부모와 따로 살았지만 "손주들 보기 부끄럽다"며 부모의 이혼을 결사반대했다. 수차례 조정 끝에 지난 7월 부부가 찾은 해법은 '졸혼(卒婚)'이었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던 부부는 법원 측 중재위원이 졸혼에 대해 설명하고 권하자 받아들였다.
박씨와 최씨는 졸혼 조건으로 '이혼하지 않고 앞으로 각자의 주거지를 정해 따로 생활한다' '서로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 '명절이나 경조사(慶弔事)가 있을 때는 미리 연락하고 협의한 뒤 가족 모임을 갖는다' 등에 합의했다. 남편의 간섭에서 벗어나게 된 박씨, 체면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최씨, 부모의 이혼을 막은 자녀들 모두 졸혼으로 합의된 조정에 만족했다고 한다.
최근 이혼조정에서 졸혼을 선택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서울가정법원 측은 "작년부터 졸혼에 대한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면서 법원 측에서 졸혼을 권하기도 하고, 이혼조정을 신청한 사람이 먼저 '졸혼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며 "특히 결혼한 지 수십 년이 지난 황혼 이혼조정에서 졸혼으로 합의된 사례가 갈수록 늘고 있다"고 했다.
졸혼은 법률에 명시된 용어가 아니어서 재판에서 판결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다. 그러나 이혼할지 말지를 협의하는 이혼조정에선 졸혼을 선택하고 조정 조항을 그에 맞게 구성할 수 있다. 법원 관계자는 "배우자 한쪽은 '도저히 같이 못 산다'고 하고 다른 쪽은 '이혼은 절대 안 된다'고 하면 대부분 조정이 결렬되고 재판으로 가게 되는데, 졸혼이 이런 상황에서 '비상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혼을 주장하다가도 졸혼을 받아들이는 주된 이유는 졸혼으로 '별거'와 '사생활'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별거하고 서로의 주거지를 찾지 않는다' '상대방이 받지 않으면 3회 이상 전화하지 않는다'는 식의 구체적인 조항이 빠지지 않고 포함된다.
또 부부의 재결합을 전제로 하지 않기 때문에 부부 관계 회복에 대한 부담도 거의 없다. 재결합을 전제로 할 경우에는 '서로 존중하고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한다'는 식의 조항이 꼭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다.
각자 따로 주거지를 마련하기엔 형편이 어려웠던 60대 여성은 졸혼에 합의하면서 '같은 집에서 생활하되 서로 다른 방을 쓰고, 밥은 각자 알아서 먹는다'는 조항을 넣었다. 이 여성은 "30년 넘게 아침·저녁밥을 차려줬는데 이젠 그만하고 싶다"고 말했다.
법원에선 이혼조정이 졸혼으로 마무리됐을 때 부부가 얻는 장점으로 '정서적 위안'을 꼽는다. 서울가정법원의 한 조정위원은 "수십 년 동안 부부였다가 헤어지면 허무함이나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며 "졸혼은 여전히 법적 부부로 연결되어 있다는 안정감을 준다"고 했다. 여기에는 졸혼에 대한 비교적 긍정적인 인식도 한몫을 하고 있다. 졸혼이 등장하기 전에도 이혼조정에서 별거에 합의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마치 이혼 과정의 한 단계 같은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꺼리는 사람이 많았다. 반면 졸혼의 경우는 무조건 이혼을 주장하던 사람이 졸혼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다음 조정 기일에 나타나 '졸혼이 요즘 유행이고 많이들 한다더라'며 합의한 사례도 있다.
경제적 이유가 졸혼 선택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남편과 나이 차가 열 살 이상 났던 한 60대 여성은 이혼조정을 신청했다가 졸혼에 합의했는데 연금 수령 여부가 영향을 미쳤다. 공무원으로 정년퇴직한 남편과 이혼할 경우 남편이 사망하면 유족연금을 받을 수 없지만, 졸혼을 하면 법적으로 부부 상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남편이 사망해도 연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졸혼이 당장 이혼을 피하는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로 사생활 보장 등의 약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거나, 부부 중 한쪽이 '이럴 바엔 이혼하지, 졸혼은 말장난'이라고 나서 결국 이혼하게 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졸혼(卒婚)
'결혼을 졸업한다'는 뜻으로, 부부가 이혼하지 않은 채 각자의 삶을 자유롭게 사는 것을 말한다. 결혼의 의무에서는 벗어나지만, 부부 관계는 유지한다는 점에서 이혼, 별거와는 차이가 있다. 2004년 일본 작가 스기야마 유미코(杉山由美子)가 쓴 '졸혼을 권함(卒婚のススメ)'이란 책에서 처음 나온 말로 알려졌다. 한국에는 지난해 소개됐고 탤런트 백일섭씨가 방송 프로그램에서 졸혼한 사실을 고백하면서 널리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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