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속어에 묻힌 '더 큰 실패'
실질적 동맹 훼손은 IRA 대한 부실 대응
‘전략적 선명성’ 외교전략 검증 기회 날려
성과는 보이지 않고 ‘날리면’, ‘발리면’, ‘말리믄’ 등의 말을 둘러싼 논란만 남았다. 지난 9월 22일 미국 뉴욕에서 나온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은 정확한 해명 없이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떡하나”에서 “국회에서 이 OO들이 승인 안 해주면 OOO이 쪽팔려서 어떡하나”로 빈칸만 추가됐다. 윤 대통령조차 전체 발언이 기억나진 않는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지난 9월 26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비속어를 사용했다’는 보도를 두고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하는 건 국민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기억은 불확실하지만 어쨌든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겨냥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 발언을 두고 대통령실 역시 비슷한 입장이다. 김은혜 홍보수석은 “윤 대통령은 ‘국회에서 승인 안 해주고 날리면’이라고 말했다”며 “예산 심의권을 장악한 거대 야당이 이를 거부하면 나라의 면이 서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를 박진 (외교부) 장관에게 전달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면서 “대통령과 국정운영에 대한 비판은 언제든지 수용하지만 대통령의 외교 활동을 왜곡하고 거짓으로 동맹을 이간하는 것이야말로 국익 자해 행위”라고 덧붙였다.
김 수석의 해명을 두고 “그러면 한국 국회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되느냐”는 비판이 일었다. 국내정치로 불이 옮겨붙으며 자연히 국회가 발언을 둘러싼 대리전에 나서게 됐다. 야당인 민주당은 윤 대통령 순방을 ‘외교 참사’로 규정하고, 박진 외교부 장관에 대한 해임건의안을 당론으로 발의했다. 여당인 국민의힘 소속 의원 6명은 윤 대통령 발언에 대해 ‘자막 조작 방송’을 했다며 지난 9월 28일 문화방송(MBC) 사옥을 항의 방문했다. 이날 권성동 의원은 “MBC 자막 조작 사건이라고 이름부터 제대로 불러야 한다”며 “단순 해프닝을 외교 참사로 주장해 정권을 흔들려는 속셈”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발언이 ‘국익’과 직결된다는 대통령실과 ‘단순 해프닝’이라는 여당 중진의원의 해명을 합치면 정부·여당이 무엇을 가장 민감하게 여기는지가 나온다. ‘바이든’이다. ‘(봄바람) 휘바이든(휘날리며+바이든)’ 패러디와 대한민국 국회의 반발까지 감내하고서도 “바이든은 아니다”고 손사래를 치고 있다. 정작 비속어 부분은 가타부타 말이 없다.
발언의 당사자가 기억이 안 난다고 주장하는 만큼 결국 논란은 ‘결론 없는 싸움’이 될 확률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소모성 정쟁은 계속되고 있다. 상황을 복기해볼 여유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한미 정상 간 이뤄진 이른바 ‘48초 회담’, “정식 회담은 맞느냐”는 물음이 나오는 한일 정상 간 만남이 그 대상이다. 국가 간 관계 역시 기본은 주고받기다. 미국과 일본이 현 단계에서 더 이상 한국정부에게 받을 내용이 없어진 건 아닌지 반드시 재점검이 필요했다. 윤 대통령의 실책은 중대한 전략 검증의 기회를 발언 하나로 날려버렸다는 데 있다. 본질은 비속어 사용 논란이 아니다.
더불어민주당 위성곤 원내정책수석부대표(가운데)와 이수진(왼쪽)·오영환 원내대변인이 지난 9월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를 마친 뒤 박진 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들고 의안과로 이동하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무엇이 동맹을 훼손하는가
정상국가의 외교는 국내적 역량의 국제적 투사로 나타난다. 대외환경을 바라보는 국민의 합의된 인식이 정부의 외교전략을 결정하고, 성패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다. 문제는 대내적으로 분열된 인식과 정치적 상징성을 갖는 정부 외교전략이 결합하는 경우다. 윤석열 정부는 미국과 밀착하는 ‘전략적 선명성’을 내세우며 출범했다. 전임 정부의 외교가 ‘전략적 모호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상황에서 선명성은 윤석열 정부의 정체성을 표상하는 지표가 됐다. 문제는 이러한 전략적 선택이 국익이 아닌 차별성 자체를 목표로 하는 것처럼 보일 때다.
윤 대통령 순방결과와 관련해 우선 따져봐야 할 것은 ‘발언 논란이 정말 동맹을 훼손할 정도의 사건’인가 하는 점이다. 국가 간 관계는 정상 사이의 친밀함이 아닌 동맹을 포함한 구조, 상대국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적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윤석열 정부는 미국을 두고 ‘70년 가까이 함께한 동맹국’, ‘어느 때보다 튼튼한 동맹관계’라고 강조해왔다. 대통령 발언 한마디에 동맹이 훼손되게 생겼다는 상황 설명은 그간 정부가 그토록 강조해온 한미동맹의 견고함을 스스로 흔드는 말이다. 미국 정부 역시 해당 발언에 별도의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발언의 실체를 뭐로 놓고 입장을 정했는지, 외교 수사인지, 속내는 무엇인지 등은 별도로 검증해봐야 할 부분이다). 이번 사태로 동맹 훼손을 언급하는 발언은 주로 정부·여당에서만 나오고 있다.
동맹 훼손을 따진다면 오히려 객관적으로 봐야 할 것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nflation Reduction Act·IRA)’이다. 미국 내 전기차 생산기반이 없는 국내 자동차 업계, 중국산 원료 의존도가 높은 배터리 업계가 직·간접적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의 전략 산업군이다. 태양광이나 풍력 등 한국 재생에너지 산업군이 수혜를 누릴 것이란 전망이 있지만 가시적 피해와 잠재적 이익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한미동맹 강화로 대표되는 선명성이 외교전략의 처음과 끝인 상황에서 IRA와 같은 문제의 대응책이 없다는 점이다. 유사한 상황이 반복돼도 특별한 방법이 없다. 문제에 대한 우려 전달 및 미국으로부터 “진지한 협의를 이어나가자”는 반응을 이끌어냈다 정도가 정부가 밝힌 성과의 전부다.
한일관계 복원 문제는 전임 정부와의 차별성만 부각되는 더욱 선명한 사례다. 정부는 집권 후 5개월여 동안 ‘반드시 지금, 한일관계를 복원해야 하는 이유’를 대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공감대 도출이 이뤄졌을 리 없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은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를 찾아가 관계복원을 타진했다. 결국 한미동맹 강화라는 외교전략의 하부 영역으로 한일관계 복원 역시 추진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뻔히 보이는 외교전략에 호응할 정도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사회가 단순하지 않다. 원하는 것이 선명할수록, 다급함을 내비칠수록 이용당한다는 것은 개인사든 국가 간 관계에서든 어김없이 적용된다. 그런데 국제사회에선 ‘선명함’을 지향하는 윤 대통령은 국내에선 ‘모호함’을 유지하며 발언을 둘러싼 의혹과 공방만 증폭시키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 9월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한 콘퍼런스 빌딩에서 열린 약식회담을 하기 전 악수하고 있다. | 국회사진기자단■시대를 정확히 읽고 있나
발언 논란과 별개로 전략은 분명하지만 성과가 없는 상황은 ‘진단을 제대로 했느냐’는 질문을 던진다. 정부가 대외환경 변화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느냐는 비판이다. 외교전략의 유효성 검증은 세가지 지표로 가능하다. 세계질서 변화를 읽어내는 안목, 대외환경 변화에 대한 국내적 공감대 그리고 궁극적으로 대외전략이 앞선 두가지 선행지표를 기반으로 하느냐 등이다. 한국 역사에서는 세가지 지표 모두가 부재한 상황이 있었다. 국권 피탈 직전의 19세기 상황이다.
세계 10위권 국가로 도약한 현재 상황과 당시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19세기 국제질서가 자주 소화되는 것은 두 시대 모두 문명사적 변환의 징후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처한 딜레마적 상황과 앞으로 풀어내야 할 문제가 유사하다는 의미다. 실제로 당시 채택되지 못한 시대인식과 대안 중에는 현대적 관점에서 유의미한 내용도 많다. 특히 유길준의 ‘양절체제’를 주목할 만하다. 동아시아를 지배해온 전통적 정치질서(사대질서)와 서구에서 들어온 근대국제질서(만국공법)가 경합하는 상황에서 당시 한반도가 양쪽 모두로부터 끊어질 위기에 있다는 것이 논의의 시발점이다. 유길준은 중국에 전통적 사대질서에 기반을 둔 ‘신의’를 촉구하는 동시에 서구의 만국공법 논리를 이용해 ‘권리’를 최대한 획득하자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이는 복합적 국제질서 속에 현실적 이익을 얻어내는 고차원 방정식으로 평가받는다. 반면 당시 친중국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전통적 강대국에 기대 위기를 돌파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익을 해치는 ‘전략적 모호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현시대의 미국과 중국은 정치·경제·군사·기술 측면에서 동조를 풀고 있다. 미국은 노골적으로 중국과의 연계 제거(디커플링)를 말한다. 미중 양국이 각각 운영하는 국제질서가 경합 혹은 공존할 수 있는 시대로의 전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반도는 미중 세력권이 겹치는 지정학적 특수성을 갖고 있다. 이는 한반도의 위기 요소(리스크)로 부각되지만 동시에 유일한 지렛대(레버리지)이기도 하다. 전환기의 정부는 지렛대를 활용하기보다 ‘전략적 선명성’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 학자들 역시 “지금도 늦었다. 빠르게 편승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힘을 실었다. 문제는 전략적 선명함이 만드는 외교적 공간의 축소다. 방향이 정해진 한국에 미국과 중국이 더 줄 것도 받을 것도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미국과의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질 경우 출구전략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생긴다. 미국에 ‘신의’를 촉구하면서 ‘권리’도 획득할 수 있는 지렛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빠른 편승’을 피력해온 전문가에게 IRA 문제 등에 대한 분석을 구했다. A전문가는 “미국과 지속적으로 협의해 나가는 것만이 대안이다”며 “한국만 피해를 입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말했다. 구체적 방안을 재차 물었지만 미국과의 대화 외에 뾰족한 해법은 말하지 않았다. 한승주 전 외교부 장관은 지난해 출간한 저서 <한국에 외교가 있는가>에서 “현재(문재인 정부)의 한국 외교는 인재도, 절차도, 정책도 없고 코드만 있는 3무 1유 외교”라고 평가했다. 또 “대통령 당선 전까지 공약한 내용을 냉철한 상황 판단 없이 무조건적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은 무책임하다. 상황에 따라 국가의 이익을 생각하며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해당 평가를 윤석열 정부에 대입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대외상황 변화보다 이념적 성향이 중시되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외교전략이 한쪽으로 쏠리는 상황은 정부의 선택지를 양극단에 있는 해답 딱 두가지로 축소시킨다. 이를 ‘원칙에 기초한 외교’라고 포장하기도 어렵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국익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면 앞뒤가 뒤바뀐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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