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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이야기

패자의 승복..美대선 230년 전통이 흔들린다

일산백송 2020. 11. 3. 12:13

패자의 승복..美대선 230년 전통이 흔들린다

뉴욕/정시행 특파원 입력 2020.11.03. 03:02 수정 2020.11.03. 10:38 

 

[오늘 美 대선] '평화적 정권이양' 美민주주의 전통 깨지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선을 이틀 앞둔 1일(현지 시각) 아이오와주 더뷰크 지역 공항에 마련된 유세장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미시간, 아이오와, 노스캐롤라이나, 조지아, 플로리다 등 남북부를 종횡무진으로 넘나들며 무려 5주에서 세몰이에 나섰다. /AP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실상 대선 불복 가능성을 예고하면서 미국의 헌정 질서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미국을 덮치고 있다.

건국 이래 지난 230여년간 미 대선은 평화적 정권 이양의 역사였다. 엄숙한 미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성서에 손을 올리고 하는 대통령 취임 선서와 함께 패자의 승복 연설들이 꼽힌다.

이 전통은 미국에서 62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남북전쟁을 계기로 거부할 수 없는 불문율이 됐다. 1860년 대선에서 노예제 폐지를 내건 에이브러햄 링컨이 승리하자, 민주당의 스티븐 더글러스 후보는 “모든 당파적 이해를 내려놓자”며 승복을 선언했다. 그러나 더글러스는 선거전에서 남부 지지층을 향해 “링컨 대통령 취임이라는 모욕을 받아들이지 말자”고 했었다. 이미 이 불복 메시지에 선동된 남부군이 봉기해 일으킨 내전으로 4년간 미국은 피바다가 됐다.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하야한 닉슨도 1960년 대선에선 일부 부정 선거 논란에도 존 F 케네디의 당선을 축하하며 승복했다.

야당 도청을 지시한 ‘워터게이트 스캔들’로 하야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도 승복 전통은 지켰다. 그는 1960년 존 F 케네디와 맞붙은 대선에서 총 12만여표의 근소한 차로 패했다. 당시 일리노이와 텍사스에서 부정 선거 논란이 있었고, 닉슨의 참모들이 이를 문제 삼자고 했지만 닉슨은 “미 헌법과 민주주의가 더 우선”이라며 케네디의 당선을 축하했다. 그는 나중에 대통령이 됐다가 하야했다.

2000년 대선 당시 한 달간 플로리다 개표 논란 끝에 결국 조지 W 부시의 승리를 축하하며 승복을 인정하는 앨 고어 민주당 후보.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 앨 고어 후보의 승복도 미국 민주주의의 전통을 이은 장면으로 꼽힌다. 고어는 전체 득표에서 조지 W 부시를 앞서고도 최대 경합주 플로리다에서 불과 537여표 차로 뒤진 상황에서 투표용지 오류 문제가 불거지자 승복을 보류했다. 그러나 승자가 한 달 넘게 결정되지 못해 나라가 마비되자 고어는 개표 중단을 수용하고 깨끗이 승복했다.

2016년 대선에서도 힐러리 클린턴은 엄청난 네거티브에 시달린 데다 전체 득표에선 앞서 패배를 인정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곧바로 트럼프 당선자에게 축하 전화를 하고 지지자들을 진정시켰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전통을 뒤집을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그는 코로나 방역 실패가 지지율 추락으로 이어진 지난 7월 폭스뉴스 인터뷰에서 “올 대선에서 지면 승복하겠느냐”는 질문에 “두고 봐야 안다” “난 깨끗이 지는 사람(good loser)이 아니다”라며 불복설을 피워올렸다. 이후 이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나는 지지 않을 것” “선거가 먼저 공정해야 한다”고 말을 돌렸고, 극우 무장 세력을 포함한 지지층을 향해 “투표 현장을 감시하라”고 했다. 개표로 승자를 결정하기 쉽지 않을 때 헌법상 연방 상·하원의 결정을 이끌게 돼 있는 마이크 펜스 부통령도 승복을 명확히 약속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는 이미 2016년 선거전에서도 민주당 지지층이 많이 하는 우편투표의 문제를 들어 불복을 예고했었다. 그때는 트럼프가 야당 후보였으며, 결국 승리했기 때문에 논란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4년간 나라를 이끈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한 뒤 직위를 이용해 불복 운동을 이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트럼프는 대선 관련 소송에 나설 변호인단 1000여명을 꾸리는 데 3000만달러(약 340억원)를 지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서정건 경희대 교수는 “연방제 국가인 미국의 대선은 주(州) 단위로 치러진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각 주가 관장하는 우편투표 시스템을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공격하는 것은 헌정 질서의 위기를 초래하는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의 메시지는 극우 지지층뿐 아니라 민주당 지지자 사이에서도 불복 정서를 낳고 있다. 지난달 로이터·입소스 조사에서 지지 정당을 불문하고 미 유권자 10명 중 4명은 “우리 편이 지면 대선에 승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고, 10명 중 2명은 “패배 시 거리 시위에 나서겠다”고 했다. 이어 USA투데이·서퍽대 조사에선 미 국민 4명 중 3명이 “대선 이후 폭력 사태가 우려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