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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발포 명령 거부한 한 경찰관
정희상 기자 입력 2019.06.07. 17:54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 신군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한 고 안병하 전남경찰국장. 그는 '공격 진압보다 방어 진압을 우선하라' '가혹행위를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고 안병하 국장의 아들 안호재씨(사진)를 만났다.
5월17일 전남지방경찰청 앞뜰에는 ‘안병하 공원’이 조성됐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 신군부의 발포 명령을 거부한 고 안병하 치안감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안병하 치안감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치안책임을 맡은 전남경찰국장(현 전남지방경찰청장)이었다. 안병하 공원 조성식에 참석한 아들 안호재씨(60)는 “경찰의 본분을 지켰을 뿐인데 영웅이 되는 나라가 서글프다”라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인 1928년 7월23일 강원도 양양군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안병하는 육군사관학교 8기로 입학해 육군 제6사단에 포병 관측장교로 부임했다. 임관하자마자 한국전쟁을 겪은 그는 개전 초기 세운 공로로 1951년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62년 안병하는 육군 중령으로 예편한 다음 총경으로 특채됐다.
그는 전남경찰국장 부임 8개월 만인 1979년 10·26을 겪었다. 연이어 전두환과 노태우 등 군대 내 사조직 하나회가 12·12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1980년 서울의 봄 등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광주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사IN 신선영
안병하 국장은 ‘민주화 요구 시위는 어차피 중앙정부에서 그 과정을 밟아가면 해결될 이슈’라고 보았다.
그는 시위 진압에 앞장서는 전투경찰(전경) 기동대에 특별 지시를 내렸다.
‘공격 진압보다 방어 진압을 우선하라’
‘도망가는 시위대를 뒤쫓지 말라’ ‘죄 없는 시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특별히 유의하라’
‘잡혀온 학생들에게 정상 식사를 제공하고 가혹행위를 하지 말라’.
안병하 국장의 지침에 따라 광주에서는 평화적이고 질서 있는 시위 문화가 자리 잡았다.
당시 경찰과 대학생 시위대는 서로 고생한다고 웃으며 인사를 하고 지나칠 정도로 우호적인 분위기를
이어갔다.
이런 평화는 1980년 5월17일 밤 신군부가 주도한 비상계엄 확대 조처로 깨졌다.
국회 해산, 대학 휴교, 김대중·김영삼·김종필 등 3김 및 재야 민주화운동가 체포 등을 담은 비상계엄 확대 조처는 12·12부터 이어진 신군부의 쿠데타 과정이었다. 같은 날 새벽 전남대학교를 점령한 7공수여단 병력은 교내에 남아 있던 대학생을 무조건 체포했다. 항의하거나 도망가는 대학생은 곤봉으로 머리를 때리고 군홧발로 짓밟았다.
5월18일 등교하던 학생들이 교문에 모여 비상계엄 해제 등의 구호를 외쳤다. 그러자 계엄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곤봉으로 머리를 깨고, 대검으로 찌르고, 달아나는 학생들은 끝까지 쫓아가 총검으로 초주검을 만들었다. 그동안 시위대를 대하던 경찰 방식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시민이 경찰을 보호해주기도 했다”
계엄군의 잔학 행위는 시내 곳곳에서 자행됐다. 시민들은 공분했다. 안병하 국장은 일선 경찰에 시위대와 대치할 때는 절대 폭력을 행사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또 계엄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부상당한 시민들의 치료에 만전을 기하라고도 지시했다. 또 도청에 주둔한 공수부대에 부하를 보내 진압 방식 개선을 건의했다. 5월20일 전남도청 앞에 있던 11공수여단을 찾아간 안 아무개 총경이 군 간부에게 시민을 무자비하게 대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러자 공수부대 간부는 안 총경을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무차별 폭행했다.
또 금남로 공수부대의 만행 현장에서 시민을 보호하던 한 경찰관은 공수부대가 휘두른 곤봉에 머리를 맞아 깨졌다. 나주경찰서장은 시위대에 적극 대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수부대원들에게 질질 끌려가며 폭행당했다. “아버지는 시민은 물론 경찰관마저 무자비하게 폭행한 공수부대의 폭력성이 5·18의 원인이라고 강조하셨다.”
계엄군은 안 국장에게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발포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안 국장은 단호히 거절했다.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 할 경찰이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
더 나아가 우발적 상황에서 경찰 발포를 우려해 광주에 있는 경찰이 지닌 총기를 모두 회수하도록 지시했다. 안병하 국장이 발포 요구를 거부하자 결국 공수부대가 직접 5월21일 집단 발포에 나섰다.
이에 맞서 무장한 시민군이 탄생했다.
ⓒ안호재 제공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고 안병하 전남경찰국장(왼쪽)은 시민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도청을 점령하던 11공수여단 병력은 시가전이 벌어지기 시작한 5월21일 오후부터 일시 철수한다. 도청 경내에 머무르던 전경 기동대 병력 1500명에게는 아무런 통보도 하지 않고 자기들만 빠져나갔다. 안병하 국장은 기동대 지휘부에 급히 연락해 도청 후문으로 차례대로 빠져나오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워낙 많은 전경이 전투복을 벗고 한꺼번에 나가려다 보니 무장한 시민군에 포위됐다. 반전이 일어났다. “시민군은 전경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음식도 주고 사복도 빌려주며 봉변당하지 않고 조심해서 돌아가도록 안내했다. 지금까지 5·18 때 경찰이 시민을 보호했다고만 알려져 있는데 이는 절반의 진실이다. 사실은 시민이 경찰을 보호해주기도 했는데 아직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1980년 5월25일, 광주 외곽 전투교육사령부에는 최규하 대통령과 이희성 계엄사령관, 김종환 내무부 장관, 안병하 전남경찰국장 등이 자리했다.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최규하 대통령 앞에서 보란 듯이 경찰 발포를 압박했다. “경찰이 무장해 도청을 접수하라.” 안병하 국장은 거절했다. “시민군 속에 경찰의 형제, 가족, 이웃이 있을 텐데 무기를 사용하면서까지 진압할 수는 없다.”
이날 회의에서 경찰에게 발포하라는 신군부의 압박이 거셌지만 안병하 국장은 자리를 박차고 나오며 저항했다. 이유가 있었다. 출세욕과 사리사욕에 물든 정치군인들이 12·12 쿠데타를 일으켜 군내 인사권을 찬탈했다는 게 당시 안병하 국장을 비롯한 육사 8기생 다수의 정서였다. “아버지는 육사 8기 동기생인 이희성이 신군부의 수족이 되어 최 대통령까지 광주 무력 진압에 허수아비로 내세우려고 하는 것을 보고 매우 화가 났다고 한다.”
안병하 국장은 다음 날인 5월26일 보안사령부로 연행됐다. 머물던 경찰항공대 임시 막사에 보안사 헬기가 날아와 다짜고짜 그를 체포해갔다. 신군부는 5월27일 새벽 공수부대를 재투입해 무력으로 도청을 탈환한다. 이날로 그의 전남경찰국장 직위도 해제됐다.
안병하 국장은 8일 동안 보안사 서빙고분실에서 조사받으며 고문을 당했다. 옆방에는 12·12 쿠데타로 체포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똑같은 수모를 당하며 조사받았다. “보안사는 우리 집을 뒤지고 재산조사까지 다 벌인 뒤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오자 파면 대신 자진 사표를 강요했다. 아버지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부하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사표를 제출했다.”
고문 후유증으로 8년간 앓다 60세에 사망
보안사를 나온 뒤에도 안병하 국장은 귀가하지 못하고 치안본부에서 사흘 더 조사를 받았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눈치만 살피던 경찰 수뇌부는 치안감 진급 대상이던 안병하 국장을 무능한 경찰이라고 비난하며 낙인찍기에 바빴다. 그는 6월2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실어증에 빠져 “죽고 싶다”라는 말 외에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이후 8년간 집과 병원을 오가며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그는 1988년 10월10일 60세로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경찰 제복을 보자기에 싸서 고이 보관하셨다. 5·18 당시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기 때문에 언젠가는 국가에서 복귀 명령이 내려올 것이라고 믿고 계셨다.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말은 광주 시민을 지켜주지 못해 죄송하고, 부하 경찰관들에게도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 안병하 국장은 마지막 작업에 몰두했다. 자신이 겪은 광주 5·18에 대한 비망록을 작성했다. 국회 광주청문회를 앞둔 시점이었다. “아버지는 당시 국회 광주청문회 증인으로 채택돼 출석을 기다리던 중 돌아가셨다. 혹시 국회에서 말을 못하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언젠가 진실은 꼭 밝혀야 한다며 8장짜리 비망록을 따로 작성하셨다.”
유족은 그 비망록을 지난해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관에 기증했다. 비망록에서 안병하 국장은 5·18 원인을 계엄군의 강경 진압과 악의적 유언비어 유포, 그리고 신군부의 김대중씨 체포 이렇게 세 가지로 꼽았다. “아버지는 비망록에서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의 대동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시민군이 도청을 점령한 뒤에도 염려했던 강력사건이 하나도 발생하지 않았으며, 치안이 잘 유지됐다고 쓰셨다.”
안병하 국장은 숨진 뒤에도 수모를 겪었다. 국립묘지 안장을 거부당했다. “지난 세월 동안 고통받은 것을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형제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큰형은 한국이 싫다며 미국으로 떠났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5·18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졌고, 유족들은 1989년부터 정부와 여러 기관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유족들의 이 같은 노력으로 안 국장은 2005년에야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다. 2006년에는 순직 군경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노력으로 5·18 당시 광주 시민들의 피해가 줄었다는 공이 인정된 것이다. 2009년 충남 아산의 경찰교육원(현 경찰인재개발원)에 ‘안병하홀’도 만들어졌다. 강제 해직 37년 만인 2017년에는 전남지방경찰청에 안병하 국장이 흉상으로 ‘복직’했다. 문재인 정부 때인 2017년에는 경무관에서 치안감으로 승진 추서됐다.
하지만 그의 염원은 아직 다 이뤄지지 않았다. 5·18 당시 그가 내린 지시에 따라 계엄군의 만행을 제지하며 광주 시민들에게 “제발 도망가라, 피하라”며 안내했던 경찰들이 직무유기 등 혐의로 강제 해직됐다. 5·18 당시 강제 진압을 거부했다는 이유 등 징계 20명, 인사조치 43명, 의원면직 123명 등 경찰 186명이 피해를 당했다.
전남지방경찰청 안병하 공원 조성식장에서 안호재씨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강제 해직된 후배 경찰에 대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하셨다. 경찰의 자긍심을 살리고, 국민의 진정한 경찰이 되려면 1980년 5·18 때 경찰이 목숨 걸고 지킨 ‘정신’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게 중요하다. 강제 해직당한 경찰관들의 명예 회복과 정신 계승은 뒷전에 두고 느닷없이 공원을 만든다? 글쎄요.”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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